역사는 무엇일까?

[서평] <포스트 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록 2006.04.12 10:41수정 2006.04.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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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일까?

암울했던 망국의 시대,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었으며, 같은 시기 백암 박은식 선생에게 역사는 "가슴 아프고(한국사) 피로 물들여진(독립운동지사)" 것이었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역사는 한낮 꾸며댈 수 있는 동화에 지나지 않았으며, 일본에게 있어 역사는 "왜곡으로 점철시켜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역사관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란 저서로 널리 알려진 E. H. 카의 명제이다. 바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인문 분야와 담을 쌓고 지내지 않은 이상, 적어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은 들어보았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그의 저서와 일간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그의 역사에 대한 명제.

단단한 게 껍질과 같은 명성을 겉에 두르고 있는 E. H. 카의 주장들을 메스로 헤집어, 좁게는 카의 저서에 숨겨진 모순과, 넓게는 서양 근대 역사주의의 오만함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 새 시대에 걸맞은 역사관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포스트 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써내려간 15통의 편지를 책에 담았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격렬하다.

카에 대해 얘기하려면 카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서 6통의 편지를 통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목조목 읽어 나간다. 왜 카의 저서와 그의 명제가 이토록 널리 알려져 있는가? 왜 카는 이러한 명제를 도출해 내게 되었을까? 카의 저서를 새롭게 읽게 되면, 이제 베이컨부터 시작하여 서양에서 벌어진 역사에 대한 논쟁사에 대한 편지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연계의 법칙과 운동의 원리를 간파하면, 자연을 굴복시켜 마침내 사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제국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근대를 이끌었던 침략주의와 현대에도 계속되는 자연파괴의 사상적 밑받침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은 경외와 공존의 대상이 아닌 굴종의 주체이거나 지배의 객체일 뿐이다. 카가 보는 역사의 목적 또한 이와 유사하다.


"역사적 지식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닌, 목적에 따라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재구성된 사실의 세계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발달은 카 혼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을 통해 서양의 철학자, 역사가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논쟁을 통해 다져 놓은 텃밭 위에 카는 잘 자랄만한 씨앗을 하나 던졌던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 되게 하자"는 모던의 기획이 좀 더 숭고해질수록 선과 악의 대비는 더욱 극명해져 급기야 '계몽된 자'는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의 우월한 주체로 자리잡은 반면에, '계몽되어야 할 자'는 복종해야 할 열등한 객체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기나긴 논쟁을 통해 서양의 철학자, 역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이 같은 모더니즘은 결국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성숙되고, 정상적'인 유럽인과, '비합리적이고 열등하며, 유치하고, 이상한' 동양인 혹은 유럽 외 인종의 양분화를 만들어낸다.

근현대 유럽인의 이런 오만하고, 철없는 사상에서 발생한 폐해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 때문에 노인의 수염이 타버리듯, 근대 문명의 발전은 기괴한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 배후에, 우리가 그들의 저서에서 한 구절이라도 외어서 읊으면 자랑이 될 만한, 유명한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그들이 그토록 주장해 온 '이성'과 '진보'의 실체에 대해 우리는 재고해보아야 한다. 카는 왜 그토록 이성과 진보에 집착하였을까? 바로 불신과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자신이 처한 인간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이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끊임없이 이성을 회복하길 바랐던 것이다. 칸트가 보여주었듯,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와 인간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거꾸로 이성과 진보에 집착하게 한 것이다.

"역사학은 근본적으로 사실의 비결정성, 텍스트의 다의성, 그리고 해석의 무한성에 기초한 열린 우주이다."

카의 저서에 실린 모든 신념에 동의하진 못해도, 역사는 지속적으로 '넓어지는 지평선'이라는 말에 저자는 애정을 표한다. 하지만 카가 그린 지평선과 저자가 그리는 지평선은 차이가 난다. 세월의 간극이, 시대의 변화가 그 원인일까? 카는 진보를 외치면서도 넓게 펼쳐진 지평선으로 향하지 못했다. '역사란 사실의 객관적인 편찬이라는 스킬라(Scylla)'와 역사는 역사가의 정신의 주관적 산물이라는 카리브디스(Charybdis)', 이 두 개의 암초로 막힌 바다를 보며 카는 바다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가 암초로 본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자체가 바다임을. 그리고 그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이 역사의 지평을 여는 것임을, 그리고 이런 역사의 지평을 여는 것이 바로 역사가의 인간의 길임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과거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현재와 현재의 대화'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역사관으로 향할 수 있는 첫걸음임을, 저자는 긴 편지 끝에 조심스레 우리에게 말을 한다.

덧붙이는 글 |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 | 김현식 | 휴머니스트 | 2006

덧붙이는 글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 | 김현식 | 휴머니스트 | 2006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

김현식 지음,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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