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장군 영정 앞에 차려진 제사상.
25일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 서거 370주년을 맞아 충남 서산시 지곡면 진충사(振忠祠)에서 추모제향이 봉행됐다.
이날 제향은 제관들의 마음과 몸을 정갈하게 하는 손 닦기(洗手), 제물 올리기에 이어 집사의 홀기에 따라 독축, 초헌관의 초헌·아헌·종헌 순서로 진행됐다. 정 장군의 후손들이 참례한 가운데 류상곤 서산시 부시장이 초헌관을 맡았다.
정충신이 서거한 때는 1636년 5월 4일(향년 60세). 매년 4월 25일에 추모제향을 지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충남 당진군 정미면 신시리에 있던 진충사를 현 위치로 옮겨지으면서부터다. 정충신의 13대손인 정종연(59)씨는 "문중에서는 금남군 할아버지(정충신)께서 돌아가신 5월 4일에 기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정충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적정 탐색' 임무를 자원했다. 왜적의 동정을 살피러 다니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의심 가는 물건이 있었다. 정충신이 활을 힘껏 당기니 숨어있던 왜적 하나가 화살을 맞고 고꾸라졌다. 정충신은 죽은 왜적의 목을 벤 뒤 본진으로 가져와 장대에 매달았다. 정충신의 '왜적 토벌'의 시작이었다.
당시 권율 장군이 왜적을 토벌한 전과를 국왕 선조가 피란 간 평안도 의주의 행재소에 알리려 해도 사방이 왜적으로 둘러싸여 길이 막혀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정충신은 그 임무를 자청해 사지(死地)로 뛰어들었다. 정충신은 수백리 길을 가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전투 결과를 행재소에 전하는 데 성공했다.
안으로는 반란 진압, 밖으로는 외적 격퇴한 청백리
이처럼 정충신은 10대의 어린 나이임에도 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아 목숨 걸고 싸웠다.
정충신은 그해 무과 병과에 급제해 이항복과 함께 선조(宣祖)를 알현했다. 이 때 선조에게서 "나이가 어리니 좀 더 장년이 되기를 기다려 크게 쓰리라"는 말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