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왜 오르냐구?

천마산 능선 종주를 마치다

등록 2006.05.03 15:45수정 2006.05.0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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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금산의 비에 젖은 촉촉한 숲길

주금산의 비에 젖은 촉촉한 숲길 ⓒ 김선호

산은 결코 개별적이지 않다. 천마산(812m·경기도 남양주시) 능선을 따라가면 철마산(786m)을 만나고, 철마산은 또 포천시 내촌면에 끝자락을 드리운 주금산(813m)까지 닿는다.

편의상 '천마산 능선'이라 불리는 이 코스는 산을 좀 탄다는 사람들이 즐겨 도전하는, 어른 걸음으로 1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만만치 않은 능선길이다.


작년 여름, 그러니까 1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천마산 능선 종주에 도전했다가 중도에서 멈춘 적이 있었다. 천마산에서 시작한 산행을 철마산에서 멈추고 다음을 기약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번엔 능선길을 거꾸로 되짚어 주금산에서 시작하여 철마산으로 향했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아이들을 앞세우고 주금산(813m)에 당도하니 한두 방울 비가 내린다. 비는 다행히 금방 그쳤지만 안개비가 떠도는 숲은 뿌옇게 흐려있다.

안개에 싸인 숲은 묘한 신비감을 안고 흐르며 싱그러운 초록의 향기를 내뿜는다. 그러니 맑고 화창한 날의 산행도 좋지만 흐린 날의 산행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어 좋다. 계곡을 끼고 가는 등산로가 포장이 되어 있어 운치가 반감이 되지만 머지 않아 촉촉하게 젖은 흙길이 나타났다.

흙길은 이내 막 돋아나는 들꽃들로 빈틈이 없다. 참개별꽃, 노랑각시붓꽃, 앉은뱅이 제비꽃…. 모두 허리를 낮추고 들여다보아야 하는 키 작은 꽃들이다.


"엄마, 옛날 사람들은 짚신을 신었잖아. 근데 짚신을 만들 때 어떤 것은 촘촘하게 엮고 어떤 것은 바닥 쪽에 구멍을 냈대."

딸아이가 짚신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왜 그랬는데?"
"응, 촘촘하게 엮은 것은 딱딱한 길을 걸을 때 신고 바닥에 구멍 있는 짚신은 이런 산길을 걸을 때 신었는데 꽃이나 풀을 밟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거야."

언젠가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었다는 아이 이야기를 들으니 발걸음이 한결 조심스럽다. 작은 생명 하나라도 소중히 여겼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씀이 감동으로 다가오고 교과서에도 안 나올 듯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선생님이나 선생님의 이야기를 간직했다가 산길에서 조분조분 이야기를 풀어놓는 아이나 모두 한송이 꽃이 되는 산행길.

a 정상 사면을 가득 메운 노랑제비꽃 군락지

정상 사면을 가득 메운 노랑제비꽃 군락지 ⓒ 김선호

주금산이 '죽음산'의 발음이라며 놀림을 받는 산은 사실은 '비단을 드리운 산'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포천시 내촌면과 남양주시 수동면과 가평군 상면에 이르는 넓은 산자락을 드리운 이 산은 그 넓은 산새에 비하면 이렇다할 절경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게다가 등산로 주변에 변변한 약수터 하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처음 이 산을 찾는 이들은 식수로 고생을 하곤 하는데 우리가족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큰산에 약수하나 없을까 싶어 소량의 물만 준비했던 게 큰 실수였다. 다행히 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호의로 갈증을 겨우 모면했지만 생각해 보면 참 아찔한 순간이었다.

주금산 정상까지는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탄성을 자아낼 만큼의 비경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시절이 시절인 만큼 한창 녹음이 시작되려는 봄 숲의 싱그러움은 밋밋한 산새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산 아랫자락에선 벌써 진달래가 피었다 지고 새잎이 돋고 있었지만 정상능선 양쪽으론 갓 피어난 진달래가 연분홍 꽃등을 달고 있어 안개 낀 등산로를 환하게 밝혀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압권이었던 것은 정상 능선 양쪽 사면을 뒤덮을 듯 피어난 노랑제비꽃의 군락이었다.

위에서 산자락을 내려다보면 산봉우리 아래가 온통 노랑 물감을 흩뿌린 듯 노랑제비꽃이 물결을 이루었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어쩌면 그리도 마주치는 등산객 한 명이 없는지, 안개 낀 주금산 산행은 호젓함이 지나쳐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정상에 도착해서야 겨우 서너명의 등산객을 만났는데 사람이 그렇게도 반가운 산행도 없었던 것 같다. 산에서 만난 등산객들은 한결같이 과분할 정도로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 주시곤 한다. 이번에도 예외없이 "대단하다"는 칭찬과 함께 맛난 떡까지 아이 손에 들려주신다. 그런 분들 덕분에 아이들은 다시 힘을 얻는다.

철마산 까지는 정상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니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아빠의 장담은 그러나 첫 번째 관문인 시루봉에서 흔들리고 만다.

완만한 능선길이라더니 진폭이 상당히 큰 포물선을 그린 듯한 봉우리를 힘겹게 건너니 다시 또다른 봉우리가 떡 하니 버티고 앞을 가로막는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경험상 정상과 정상을 연결하는 능선이 대체로 완만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낙관했는데 주금산 능선은 그 중 예외였다.

게다가 셀 수도 없이 자주 나타나는 봉우리들은 쉼 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계속하게 만들었고 아이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게다가 조금밖에 준비하지 못한 식수가 떨어진지 오래고 가도 가도 물을 마실만한 웅덩이 하나 없는 능선길은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물을 대신할 오렌지 두 알이 남은 지점은 여전히 주금산 능선길. 임시방편으로 진달래꽃잎을 따먹어 보니 의외로 이 보드라운 꽃잎에서 수분이 느껴진다. 안개도 걷히고 따가운 햇살이 내리는 능선길에서 그렇게 진달래꽃잎을 따먹으며 봉우리를 몇 개를 넘었을까.

할아버지 등산객 세분이 아이들을 불러 세운다. "너희들 참 장하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초콜릿이며 먹을 것을 아이들 손에 들려주시는데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라는 소리가 목 언저리를 맴돈다. 주변에 약수터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물을 나눠 달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남자는 약할지 모르지만(?) 아빠는 강했다.

"저, 아이들이 목이 마르거든요. 물을 조금만 나눠 주실 수 없는지요?"

조심스러운 요청에 선뜻 할아버지 한 분이 물을 나눠주시겠단다. 배낭에서 얼른 우리 식구용 1.8ℓ생수통을 내미니 500㎖미리 생수병을 내밀던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신다. 그러나 1.8ℓ 생수통 바닥을 적실 정도의 500㎖ 생수는 갈증에 시달린 아이들에겐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당신들도 넉넉하지 않은 물을 기꺼이 나눠주신 할아버지 정성을 받은 덕분일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르락 내리락 능선길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가 철마산인가' 싶어 봉우리를 힘겹게 오르면 '이 산이 아닌가베'를 반복하기를 몇 번. 주금산 정상에서 만나 우리 가족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철마산으로 향하는 중년부부도 보기 드물게 힘든 산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a 드디어 철마산 정상에 서다. 산에서 만난 아저씨의 길 안내를 자청한 아들.

드디어 철마산 정상에 서다. 산에서 만난 아저씨의 길 안내를 자청한 아들. ⓒ 김선호

그래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이 없다고 했다. 도무지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던 수많은 산봉우리를 건너고 건너 마침내 철마산에 당도했다. 산 정상을 밟는 일이 그렇게나 감격적인 일이 또 있을까. 지칠대로 지친 딸아이에 비해서 여전히 씩씩한 아들녀석은 철마산을 처음 올랐다는 중년부부를 위해 하산길을 앞장서 안내한다.

지난해 철마산 능선에서 우리도 이 중년부부와 같이 하산길을 몰라 헤맸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왔었는데 이번엔 아들녀석이 도우미로 나서 길을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11살인 아이의 기억력은 믿을만했다. 길을 알고 있는 아빠도 정확히 길을 안내하는 아들녀석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한번 와 본 길이라 매번 갈림길에서 헷갈릴 때마다 녀석은 "이곳은 앉아서 물 마시던 곳, 이곳은 배를 깎아서 나눠 먹던 곳"이라며 "그러니 이곳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안내했다. 앞장서는 아들녀석이 참으로 대견해 보인다.

넉넉히 햇살을 받은 숲길은 벌써 초여름을 연상케 할만큼 푸른 잎들로 빽빽하다. 신갈나무와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들이 피운 나뭇잎이 벌써 한 뼘이나 되는 것도 있다. 다 자란 참나무 잎새들이 조금씩 초록색으로 변해가면 성큼 여름이 와 있을 것이다.

푸른 잎새들 사이에서 연분홍 산철쭉이 꽃을 피웠다. 올 들어 처음으로 만나는 산철쭉이다. 숲의 싱그러움을 안으며 가는 두어시간의 하산길에서 외려 피로가 사라짐을 느낀다. 예전 우리가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함께 하산했던 중년의 부부에게 서울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까지 안내를 해 드렸다.

능선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커다란 봉우리를 이룬다. 또 봉우리는 또 다른 봉우리를 만나 큰산을 이룬다.

천마산에서 철마산, 철마산에서 주금산까지의 천마산 능선을 걸으면서 참 많은 봉우리들을 만났고, 잊지 못할 사람들도 만났다. 아이들도 훌쩍 큰 느낌이다. 아이가 물었었다. 왜, 힘들게 산을 오르냐고.

산과 사람과 그리고 뭇 생명들과의 관계맺음, 것을 경험하는 일. 그것이 산을 오르는 이유가 아닐까, 아이야!

a 하산길에서 만난 올해 첫 산철쭉

하산길에서 만난 올해 첫 산철쭉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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