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최초 타이틀 늘면 평등사회 머지않았다

[최희영의 아름다운 그녀]첫 여성 대법관 임명 그후 18개월 김영란 대법관

등록 2006.05.09 17:33수정 2006.05.0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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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타임스
지난 2004년 8월, 여성 최초로 대법관이 된 김영란씨는 지난 18개월의 시간을 '세월'이라 표현한다. 그만큼 대법관 역할이 힘들고 고되다는 뜻일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대법관으로서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아울러 남편 강지원 변호사의 아내로, 두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나직하고 유연하게 이야기했다.

"18개월 동안 대법관으로 살았는데, 참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아요. 업무 자체가 너무 힘들거든요. 최종판결인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해야 해요. 하나하나의 사건이 모여서 우리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잖아요. 판결 하나가 엄청나게 큰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고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는데, 거의 매일 집으로 일을 가져와서 합니다. 밤을 새고 새벽까지 일할 때도 많고요."

인간미 폴폴 풍기는 수더분한 대법관

김영란 대법관에 대한 선입견은 대화 첫머리에서 깨졌다. 여성 최초 대법관으로서 위엄과 권위가 뚝뚝 흐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김 대법관은 소박하게 웃으면서 솔직하게 대법관 생활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수더분한 인간미가 배어났다.

"대법관은 특별한 세계관을 가져야 해요. 항상 소수자의 생각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법은 다수의 약속으로 정해진 것이지만, 거기에서 소외되는 소수는 항상 있거든요. 다수가 소수를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일 거예요. 그런 관점, 그런 세계관을 법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늘 고민하고 있어요."

그녀는 대법관으로 임명된 직후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에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대법관 인사청문회 당시 국회의원들이 호주제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묻자 "국회에서 해줘야 할 일을 왜 내게 묻느냐"고 반문하면서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강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호주제가 폐지됐다. 남다른 감회가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 노력해온 여성단체들이 이뤄낸 성과죠. 대법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할 뿐이에요. 호주제 폐지는 남녀간 억압이 없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의 법조계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2년 연속 여성이 사법고시 수석을 차지했고, 사법고시 합격자의 24%가 여성이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여성 최초 대법관은 이런 사회적 흐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느 분야든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거니까요. 그렇게 가다 보면 여성 최초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될 거라고 믿어요. 저 역시 그런 세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여성 법조인도 늘고 있어요. 하지만 시험 봐서 성적으로 뽑는 분야만 여성들이 늘어나는 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다른 직업은 아직 평등하지 않은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잖아요. 여성이 사법고시 수석을 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남녀가 대등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계속 고민하는 것도 중요해요."


좋은 부부의 비결은 친구처럼 지내는 것

본사 주최 제3회 건강걷기대회에 참석한 김영란·강지원부부.
본사 주최 제3회 건강걷기대회에 참석한 김영란·강지원부부.우먼타임스
김영란 대법관은 많은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에서도 바람직한 부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강지원 변호사와의 알콩달콩 부부관계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김 판사가 대법관에 임명될 당시 강지원 변호사는 "변호사 외의 활동을 자제하고 외조에 전념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부부의 조건은 무엇일까.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지요. 각자의 삶을 배려하면 좋은 부부가 되는 것 같아요. '좋은 부부'라고 불리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대중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웃음) 노력해야죠. 좀 더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김영란, 강지원 부부는 그렇게 산다. 마주보고 집착하지 않고, 한 방향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산다. 같은 법조인으로서 서로의 일을 잘 이해해준다. 법조인 부부라고 형법 운운하면서 싸울까. 자칫하면 삭막해질 수 있는 직업의 속성을 서로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가치관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그녀가 말하는 좋은 부부의 조건이다.

남편과 그런 것처럼 두 딸과도 친구처럼 지낸다. 두 딸은 모두 인성교육 중심의 대안학교를 나왔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교육환경에 아이들을 맡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딸은 대학을 졸업해 미디어 관련 직장을 알아보고 있고, 작은딸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각종 단체의 강좌를 들으면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두 딸 모두 뭘 하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겠죠.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 찾아야죠. 아이들이 크는 내내 그냥 내버려뒀어요. 억압하지 않으니까 반발도 없었어요. 자유롭게 컸죠. 그런데 자유에 대한 책임이 크다는 것도 느낄 거예요. 부모의 역할은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이 정말 힘들 때 기댈 어깨를 내밀어주는 것이요. 아이들이 '엄마한테 가면 발 뻗고 잘 수 있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엄마인 것 같아요."

김영란 대법관 약력

1978년 제20회 사법고시 합격
1998년 2월~1999년 2월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
2001년 2월~2003년 2월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2001년 3월 서울시 종로구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2003년 2월~2004년 8월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
2004년 8월~현재 대법원 대법관
각자의 삶과 가치관을 존중하면서 친구처럼 사는 것, 그녀가 말하는 좋은 가정의 조건이다. 가족뿐일까. 세상의 모든 관계가 그렇게 된다면 건강한 사회가 될 거라고 그녀는 믿는다. 그런 가족들과 일요일만큼은 함께하려고 노력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 가고,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면서 '세상의 공기'를 맛본다. 그 공기가 좋은 판결을 위한 자양분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어느 일요일, 남편이 늦게 일어나서 저와 딸들만 '왕의 남자'를 본 적이 있어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안 남편이 '남편 소외시키고 자기들끼리만 가는 바람에 천만이 넘는 사람이 본 영화를 못 봤다'고 투덜댄 적이 있어요. 꼭 남편과 함께 볼 필요 있나요. 딸과 볼 수도 있고, 혼자 볼 수도 있지요. 서로를 배려하면서 그렇게 살아야죠."

소수가 다수에 의해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는 가치관을 지닌 대법관, 남편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존중하면서 친구처럼 사는 아내, 두 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속 깊은 엄마, 자신의 가치관으로 타인의 삶을 옭아매지 않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는 시민…. 김영란 대법관은 그렇게 산다. 그 삶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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