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아, 너희가 내 스승이란다"

오늘은 스승의날, 나는 제자들이 그립다

등록 2006.05.15 15:05수정 2006.05.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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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은 학생이 선생님을 생각하고 기리는 날이겠지만, 저 또한 아이들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날입니다.

학교가 아닌 집에서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긴 한데, 제자 아이들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기에는 학교보다는 집이 제격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깐 아이들을 위해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작년에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 그 때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시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충분한 사랑을 주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의 미숙함 때문이었지요. 여느 해보다 조금 더 힘들었다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학급 앨범을 만들어주지 못한 아쉬움도 큽니다.

그런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 동안 아이들에게 써준 생일시 몇 편과 사진 몇 장을 한 자리에 모아 보았습니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없는, 즐겁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3월 편지] 조용하다는 것은

▲ 3월 단합대회-비빔밥처럼 함께 어우러져야 제 맛이 나지!
ⓒ안준철

내가 만든 비빔밥 맛있게 먹고
단합대회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어.
먹성 좋으신 처녀 부담임 선생님께서
네가 너무 말이 없다며
조금은 걱정스런 얼굴이셨는데
난 그냥 웃고 말았지, 널 아니까
네가 조용한 아이라는 것을.
조용한 것과 어두운 것은 다르다는 것을.

조용하다는 것은
어쩌면 안에 더 큰 열망 같은 것을
안고 산다는 말이기도 해.
그런 사람들은 입으로보다는
눈으로, 가슴으로, 글로
자기 마음의 열정을
표현하기도 하지.


넌 꿈이 네일 아티스트라지.
누군가를 아름답게 가꾸어주는
그것이 비록 작은 손톱일망정
작은 것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그런 예쁜 꿈을 가졌다지.
네 엄마가 원하시는 복지사의 꿈도
남을 돕고 가꾸어 주는 일이지.

어느 길을 가든 넌 잘 해낼 거야.
너의 조용한 성격이
어느 날 갑자기
뜨거운 열정으로 불붙는 그날이
꼭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야.
그런 날이 꼭......


2005년 3월 ○○일

[4월 편지] 너를 위한 작은 징검다리였으면

▲ 산 위에서의 식사.
ⓒ안준철

지금은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너에게 편지가 왔을까 궁금했는데
'사랑하는 선생님께…'라는
반가운 글씨가 눈을 즐겁게 하는 구나.

대학에도 가고 싶고, 취업도 하고 싶고
돈도 디따 많이 벌고 싶고
미용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그러나 아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고…

이것이 우리 수미의 현주소구나.
그런데 넌 알고 있을까?

대학에 가든, 돈을 디따 많이 벌든
무엇이든 한 순간에 이룰 수는 없다는 거
무엇이든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는 거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한다는 거

수미야,
너의 열일곱과 열여덟의 사이가
깊고 푸른 강 하나를 건너듯
그렇게 큰 걸음이었으면 좋겠다.

건너와서는
후회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향해
씩 한 번 웃어주고
예쁘게 환송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때 나는 네가 건너는
작은 징검다리였으면 좋겠다.

2005년 4월 ○○일

[5월 편지] 푸른 5월보다도 더 푸른 너

▲ 꽃과 아이들.
ⓒ안준철

저 맹희에요 ㅋㅋㅋ
네가 보내온 첫 편지를 받고
맹희라... 누구? 아, 명희!
그렇게 네 이름이 떠오르면서
너의 동그란 예쁜 얼굴도 함께 떠올랐었지.

왜 명희를 맹희라고 했을까?
나도 가끔 준철이를 준칠이라고 하는데
그런 장난끼였겠지 하면서도
준칠이는 뭐가 하나 빠진 듯하지만
맹희는 그 반대의 느낌이 들곤 했었지.

속이 꽉 찬 배추 속 같다고나 할까?
아마도 네가 그런 아이여서
싱싱하고 밝고 예쁘고 참한 아이여서
푸른 5월보다도 더 푸른 아이여서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지.

작년 4월 1일 만우절이었을 거야.
넌 교실을 바꿔치기해서
내 영어수업을 받고 있었지.
남의 반에 와서도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고
어찌나 열심히 대답을 했던지
너하고 나하고만 수업을 하는 꼴이 되었지.

그 정도의 실력과 적극성이면
간호사든 유치원 선생님이든
넌 꼭 네 꿈을 이루고 말 것 같았지.
어제처럼 물놀이에 가서
큰 일 당할 뻔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너를 생각하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싹 풀리곤 한단다.
푸른 5월보다도 더 푸른
싱싱하고 밝고 예쁘고 참한
너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하면.

2005년 5월 ○○일

[6월 편지] 파란 봉투의 편지

▲ 물 속으로 밀어내기-가끔은 억척스러울 필요가 있단다.
ⓒ안준철

너희들 땜에
힘 하나도 안 들 때도
넌 도서관으로 달려와
이렇게 노래했지.

- 선생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따금 아주 이따금
너희들 땜에 힘이 들 때도
넌 파란 봉투에 편지를 담아
이렇게 날 위로했지.

- 선생님 힘내세요.
주눅 들어있는 선생님은 싫어요.

너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교실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너의 예쁜 글씨와 그림으로
급우들의 생일이 더욱 빛이 났었지.

남을 반짝이게 하다보면
정작 자신은 어두울 때도 있지.
그 어둠까지 세차게 끌어안아
남의 영혼을 울리는 예술가가 되렴.

언젠가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네 이름 석자가 박힌
아름다운 만화책이 눈에 띄기를.
작가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그때까지 땀 흘리며 노력하는
우리 인영이가 되었으면.
꼭 그래 주었으면.
꼭.......

2005년 6월 ○○일

[7월 편지] 가랑잎을 닮은 아이

▲ 수중훈련하는 아이들-삶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함께 있단다.
ⓒ안준철

강원도 어느 마을에
가랑잎 초등학교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가랑잎을 닮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단다.

너의 꿈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이
가랑잎을 닮은 아이들이 다니는
강원도 마을 가랑잎 초등학교였지.

네가 만약 선생님이 된다면
가랑잎을 닮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너 또한 한 장의 작은 가랑잎을 닮은
그런 순박한 선생님이 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비록 공부는 잘 못해도
마음만은 예쁜 가랑잎을 닮은
그런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지.

맑고 어진 자연의 품 안에서
세상에서 으뜸이 되려는 마음보다는
세상 저 낮은 곳까지 가 닿으려는
아름다운 마음들로 채워주고 싶었지.

가랑잎을 닮은 아이야,
열정이 없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단다.
너의 착하고 순박한 마음 밭을
오직 한 마음으로 갈고 또 갈아

꼭 너의 꿈을 이루렴.

2005년 7월 ○○일

[8월 편지] 사랑

▲ 수련장 식당에서.
ⓒ안준철

사랑이란 무엇일까?
예쁘다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와락 손을 잡아주는 것이 사랑일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은 뜨겁고 간절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라고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이라고.

내 사랑 안에
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너를
주인 되게 하는 것이라고
넌 내게 말해주었지.

내가? 언제?
넌 동그란 눈을 뜨고
내게 물으려하겠지만
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스승이 되고 말았단다.

한 때는 미애랑 동천에 나가
땀 흘리며 에어로빅을 하기도 했던
그 강변 둑길에 핀
청순한 코스모스를 닮은 너를
이제는 먼발치에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지.

꿈이 없다고 했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품어온
간호사의 꿈을 기억해내어
다시금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지?

곁에서 지켜보마.
뜨겁고 간절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2005년 8월 ○○일

[9월 편지] 호기심 잔뜩 묻은 예쁜 눈으로

▲ 가을수업-나라는 존재감
ⓒ안준철

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는
너의 예쁜 눈!

출석을 부를 때마다
네 이름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눈에 웃음을 가득 달고
나를 가만 바라보곤 했었지.

그때 넌 알고 있었을까?
그 눈길이 하도 귀여워서
다른 애들 이름을 부르다가도
슬그머니 널 곁눈질 했다는 것을.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올 해는 기쁘게도 네 담임을 맡아
호기심 가득 한 예쁜 눈을 자주 볼 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단다.

넌 눈으로만 얘기할 뿐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지만
몸도 마음도 모두 힘들던 날
나를 도와주러 도서관에 왔었지.

지은이랑 신혜랑 함께 와서는
바삐 손놀림하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널 딸로 두신 아빠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에 자꾸만 빠지곤 했단다.

이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너만큼이나 예쁜 꿈을 갖는 거
꿈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너를 보는 거
그날이 어서 오길 고대하마.

2005년 9월 ○○일

[10월 편지] 오, 무정한 마음이여!

▲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가을처럼 깊어가기를.
ⓒ안준철

끝내 오지 않은
너의 편지를 기다리다
잠이 든 것이

하루
이틀
사흘.....

생일 시를 써 주지 않겠노라
협박하면 답장을 보내겠지
부질없는 희망을 품은 것이

하루
이틀
사흘.....

오늘도 나는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다
꾸벅 꾸벅 졸고 있나니

오, 무정한 사람이여!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세상에 하나뿐인 너의 생명
예쁘게 잘 다듬어
높게 쓰임 받으시라.

2005년 10월 ○○일

[11월 편지] 진실, 너의 눈을 들여다 볼 때마다

▲ 첫눈 오던 날.
ⓒ안준철

이 진실…

매일 아침 출석부를 들고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맑은 눈빛으로 대답하는
너의 눈을 들여다 볼 때마다
난 세상을 더 얻은 듯 했지.

수업시간마다 네 이름을 부르며
네 안의 생명, 네 안의 진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내 안의 진실도 안녕한지
안부를 묻곤 했단다.

너를 낳으시고
너의 이름을 진실이라 지어주신 분은
알고 계셨을 거야
세상을 다 얻고도
진실하지 않다면
그것은 마음의 거지나 다름없다는 것을.

어제 밤 보내온 너의 편지
가슴에 담으며
진실이란 금방 드러나는 게 아니지만
때로는 멀고 험한 길이지만
진실만큼 분명한 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기도 했단다.

너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너를 향한 사랑이 그러하듯.

2005년 11월 ○○일


a 서른 다섯 송이의 아이들.

서른 다섯 송이의 아이들. ⓒ 안준철

"아,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동안에 쓴 생일시를 뒤적이다가 저 혼자 한 말입니다. 12월에 쓴 생일시가 한 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12월에 생일이 든 아이가 하나도 없었을까? 그런 지도 모르지요. 12월은 그렇더라도 1월과 2월에 생일이 든 아이들은 저에게 불만이 많을 것입니다. 하긴 그 아이들도 할 말이 없긴 합니다. 방학 중에 저에게 메일을 보내면 시를 써주겠다고 했거든요. 다른 아이들도 생일이 오기 한 달 전부터 메일을 주고받았으니까요.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승의 날인 오늘 저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스승의 날이면 들리곤 하는 많은 말들이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은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겸허하게 받아들여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더 열심히 사랑하고 아끼고 존중하겠습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때로는 거친 투쟁의 함성으로 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에는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으로 대하지 않고 공부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입시위주 교육을 막아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하루빨리 입시 전쟁터가 아닌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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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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