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여기자 1호 "축구는 내 운명"

25년 전, 축구계가 분데스리가 필름을 싫어한 이유는?

등록 2006.06.19 10:39수정 2006.06.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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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
[문수경 기자] 2006년 6월, 대한민국 여성들은 축구와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중 이향렬(51·대한체육회 편집위원)씨도 끼어 있다.

지난 9일 독일 월드컵 개막식날 이씨가 운영하는 삼성동 낙지요리 전문점 '유정낙지'를 찾아갔다. 가게는 온통 월드컵 분위기가 물씬 났다.

입구를 환히 밝혀주는 축구공 모양의 등과 식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대형 평면TV. 벽면 한편에는 신문에서 오린 23명의 태극전사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 식당의 사장인 이씨는 유명한 축구 마니아로, 대학시절 차범근·박성화 등 모교인 고려대의 스타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 곳은 축구 팬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그는 지난해 박주영 선수의 팬클럽 발족식날 맥주를 무한 제공하고 '붉은악마' 치우천황기 제작에 1000만원이 넘는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25년째 조기축구회에서 골키퍼를 맡고 있다. 요즘은 월드컵 중계 관람 스케줄을 짜느라 바쁘다. 그의 휴대전화 끝 번호는 2002번이다.

스포츠 여기자 1세대인 이향렬씨. 그가 숨 쉬는 공간엔 온통 축구 열기가 가득하다.
스포츠 여기자 1세대인 이향렬씨. 그가 숨 쉬는 공간엔 온통 축구 열기가 가득하다.여성신문
"나이들면 평소 좋아하던 요리 실컷 해먹고 싶어서" 6년째 낙지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향렬씨는 여성 스포츠 기자 1세대다. 78년부터 87년까지 <동아일보> 스포츠 기자로 일했고 프리랜서 기자를 거쳐 스포츠TV에서 5년간 뉴스팀장을 역임했다.

MBC 라디오 '가요스포츠'를 진행해(82~91년) 84년에는 MBC 방송대상 라디오 MC부문상을 타기도 했다. 지금은 대한체육회 편집위원으로 틈틈이 칼럼을 쓰고 있다.


이씨는 어릴 때부터 스포츠에 푹 빠져 살았단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동대문구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엄마 역시 축구 팬. 지금도 중계방송을 꼬박꼬박 챙기는 82세 노모는 축구하는 날이면 목욕재계한 뒤 새 옷까지 차려 입고서 경기를 본다고 한다.

그런 가풍의 영향일까. 원래 영문학도였던 이씨는 스포츠 기자가 되기 위해 재수를 해서 체육교육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한다. 당연히 스포츠 기자가 됐다.


"그 때 제 별명이 '천연기념물'이었어요." 그는 물만난 고기처럼 경기장을 헤집고 다녔다. 특종(79년 남자테니스 데이비스컵 본선 진출 예측 등)도 자주 터뜨렸다.

하지만 좌절도 많았을 터. 이씨는 81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메이저리그와 분데스리가 축구 필름을 어렵사리 구해서 MBC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했는데 축구계의 반응은 싸늘했어요." 분데스리가 축구를 보여주면 한국 축구는 더 죽는다는 것.

박지성·이영표 등 유럽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여럿 있는 지금 보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그 땐 그랬다.

월드컵에 관한 추억도 많다. 한국 여기자로는 유일하게 86년 멕시코월드컵을 현장취재했고 96년 5월 31일에는 2002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발표의 순간을 스위스 현지에서 지켜보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이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했던 98년 프랑스월드컵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2002년 6월 4일 폴란드전에서 한국이 첫 승을 거둔 날. "옆에서 보던 선배는 다리에 쥐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식당 내부에 설치된 축구공 모양 스탠드.
식당 내부에 설치된 축구공 모양 스탠드.여성신문
2002년 4강 신화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맞은 독일월드컵. 이씨는 성적에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꺼냈다. 빈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그라운드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강팀이 지고 약팀이 이기는 스포츠의 묘미를 만끽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문한다. "토고한테 지는 건 자존심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가 토고라는 나라를 언제 알았어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며 "승리에만 목매는 게 축구 마니아는 아니다"고 꼬집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효창운동장에서 서울시 전국체전 고교대표 선발전(배재고-중앙고)이 있었는데, 관중은 저까지 딱 4명이었어요."

프로의 근간을 이루는 아마추어가 외면받고 있는 현실에서 월드컵에만 열광하는 분위기가 안타깝단다. 그래서 이씨가 국내 축구 살리기에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현재 서울시 시민구단 창단준비위원으로 있으면서 '서울 유나이티드' 창단 준비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진정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구단을 만드는 게 꿈이에요."

그는 스포츠 전도사로서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스포츠 문외한인 아줌마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다녔는데, 난생 처음 야구장을 가본 아줌마들은 "이렇게 재밌는 삶이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맙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단다.

"오빠도 남편도 경기장에 안 데려갔다고 분개하더라고요."

본인도 신기한 체험을 했다. "제가 눈이 굉장히 나빠요. 어느 날 야구장을 운전하고 가는데 눈이 너무 잘 보이는 거예요." 심 봉사 눈뜨듯 눈을 뜬 것이다. 60개에 달하는 안경을 못 쓰게 됐지만 어디 그게 대수랴. "경기 보면서 수시로 눈 마사지를 하고 푸른 잔디를 보니까 눈이 맑아진 거죠."

'축구는 나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씨의 꿈은 소박하다. "이 세상에 잠깐 소풍 나와서 기껏 70~80년 사는 건데, 사는 동안 좋은 축구 경기 많이 보고 싶고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해요."

축구는 남성만의 운동? 천만에!
'여성' 축구동호회 활발... 인터넷 동호회 80여개

축구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태극전사들의 장단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해외 축구선수들의 프로필을 줄줄 꿰는 여성들이 즐비하다.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축구를 하는 여성들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현재 여성 축구클럽은 등록이 확인된 팀만 150개(미등록 포함 180개). 소속 인원도 4000명에 이른다.

포털사이트 다음에는 축구동호 카페만 1330개다. 이중 여성 축구동호회가 67개다. 네이버에서도 전체 302개의 축구동호회 중 여성 축구동호회는 6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여성 축구클럽은 'FC 헤이데이'(cafe.daum.net/SWSclub)다. 2004년 1월 7일 출범한 이곳은 순수 아마추어 축구동아리다. 회원들의 연령대는 19~34세. 현재 회원 수는 8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2004년 4월 이래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운동장(용마초등학교)에 모여서 공을 찬단다. 한번 모이면 20~30명이 참가한다.

아직 실력은 걸음마 단계지만 교류전도 활발하다. 종로구여성축구회, 광진교회여성팀 등과 교류전을 열었고 오는 18일과 25일에도 미8군 여자축구팀(용산미군부대), 용문여성축구단(양평)과 시합이 잡혀 있다.

베스트 11 선정 기준은 출석률이 높은 순서. 남편과 남자친구의 응원도 대환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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