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

[서평]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방>을 읽고

등록 2006.07.06 15:31수정 2006.07.0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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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 겉표지
<언니네 방> 겉표지갤리온
내가 '언니네'사이트(http://www.unninet.co.kr/)를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네'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렸다는 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맞닥뜨리게 된 사회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 할 때 '언니네'는 내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예를 들어 회사일 외의 일을 업무시간에 부탁하는 직장 상사에게 그 일은 못한다고 말하고 나서 '그냥 한다고 할걸 그랬나'라는 이유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도, 여직원들에게 컵 씻기를 강요하는 회사에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회사 홈페이지에 올리고 나서 힘들어할 때도 '언니네'는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물론 '언니네'가 내게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해 준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언니네'안에 있는 '자기만의 방' 게시판에 언니들이 올리는 솔직 담백한 얘기들을 읽으면서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언니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정말 용감하게 당차게 그렇게 삶을 살아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런 언니들의 삶을 보면서 나 또한 사회의 벽 앞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다짐들을 했었다.

그렇게 내게 각성제가 되기도 했고 삶의 교훈이 되기도 했었던 그 '자기만의 방' 게시판 언니들 글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아주 기쁜 마음에 그리고 '언니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을 했다. 예전에 읽었던 언니들의 글을 이렇게 책으로 다시 만나니, 참 반가웠다.

'언니네 방'은 그렇듯 언니들이 여러 해 동안 써온 소중한 글들 중에서 추리고 추려 정말 우리네 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자기만의 방'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 솔직한 글들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성에 대한 이야기와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주 진솔하게 담겨져 있다. 너무나 솔직한 언니들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공공장소에선 이 책을 꺼내기가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언니네 방'중에 노란 민들레에 대한 글이 있는데 '언니네'에서 노란 민들레 배지를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하자는 것이었다. 작고 예쁜 노란 민들레 배지를 달고 다니다 혹시라도 길거리에서, 혹은 회사에서 맞닥뜨리는 위기 상황에 이 노란 민들레 배지를 단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도움을 청하자는 글이었다. 나는 이 제안이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너무도 황당하게 웬 남자가 낯선 여자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그 때 지하철 안은 순식간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왜 그러냐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다음 역에서 내려 버렸다. 여자가 남자의 발을 밟았거나, 남자가 여자의 발을 밟았는데 여자가 '씨'라고 했거나 그 둘 중 하나의 경우였는데, 난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저 여자의 경우였다면 어떻게 해야 됐을까 라는 생각에 난 머리가 너무나 복잡해졌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 한 사람 없던 그 여자는 그냥 상황을 피해버리고 말았지만 아마 지하철에서 내린 후 너무 서러워 울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분을 삭였을 것이다.


이 때 만약 그 여자가 노란 민들레 배지를 달고 있었다면, 그리고 적어도 주위에 노란 민들레 배지를 단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여자는 그렇게 쉽게 상황을 끝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란 민들레 배지를 만들자는 제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 솔직하지 못하다. 아니 솔직하지 말라고 이 사회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가슴 속에 쌓여 울화가 터질 지경이다. 그때 만약 '자기만의 방'이 있어 그 얘기들을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가 있다면 언니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가벼워 지지 않을까.

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갤리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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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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