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흔적에서 역사의 숨소리를 찾다

[서평] 이석우 교수의〈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

등록 2006.07.11 18:19수정 2006.07.12 09:39
0
원고료로 응원
책 겉그림
책 겉그림인디북
"역사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고, 사라진 과거의 망각과 상실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미술 역시 순간으로 사라질 아름다움과 시대적 흐름을 화면 속에 잡아두는 반 시간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한순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시간의 흔적이라면 미술은 표현의 흔적이다."

이석우 교수가 쓴 〈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인디북·2006)에 나오는 글이다.


서양사학자이자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역사와 미술을 따로 떼어놓지 않는다. 항상 한 울타리 속으로 그 둘을 넣어 생각한다. 그만큼 이 땅의 역사 속에는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미술이 함께 해 왔고, 미술 속에는 그 역사가 함께 묻혀 왔음을 밝히는 것이다.

사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다. 시간의 흔적 속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들이다. 역사학자는 그것을 나름대로의 주관을 갖고 그 실타래를 풀어헤친다. 물론 실증과 객관적 잣대로 풀어가지만 거기에는 확증할만한 주관이 담기기 마련이다. 더욱이 엉킨 실타래를 속 시원하게 푸는 것뿐만 아니라 쉽게 잇지 못하는 시대적 단절까지도 펜이라는 실 하나로 그 이음새를 잇기도 한다.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게 있다면 그림일 것이다. 그림은 작가의 의도가 담기기 마련이다. 어떤 대상이나 장면을 그리더라도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언제나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지만 그 대상은 늘 과거에 속해 있다. 그 때문에 그림이 아무리 현재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역사적 산물이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석우 교수는 역사와 미술을 항상 함께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잉태된 미술을 보고, 미술 속에서 배태된 역사를 읽는 것은 그 까닭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시간의 흔적으로, 미술을 표현의 흔적이라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서양사학자이다. 서양사 중에서도 고·중세 지성사가 주요 연구 영역이다. 그 중에서도 중세의 신학적 이념을 세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전공이다. 그렇지만 서양 정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그에게 또 다른 관심이 있다면 그건 미술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그는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을 펴낸 바가 있다. 그것은 그가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품어 온 한국 현대미술가 13명의 삶과 작품을 탐색한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가 미술이란 영역에 얼마나 깊게 빠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역사와 미술, 미술과 역사의 관계를 더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영국의 옥스퍼드에 머물 때의 대학생활이 어떠했으며, 그곳의 대학풍토는 어떠한지, 그리고 나름대로 그린 예쁜 엽서 같은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러 점 묶고 있다.


"역사를 사랑한다는 말은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며 현재에 정직하고 미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조그마한 성취와 이익에 매달려 살 것이 아니라 역사를 상대로 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은, 이 시대의 부끄러운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직접 역사를 알고 역사를 사랑하는 일이다."(이 책 206쪽)

이는 사랑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학도들이 품어야 할 몫을 이야기해 주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단 사학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대학 생활을 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몫일 것이다.

모름지기 대학생이라면 나름대로 추구하는 학문에 정열을 쏟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정열이란 정직과 순수 그리고 깊은 통찰을 떼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현실 사회는 당장의 이익을 요구하며 모방을 부추기지만 역사적인 안목에서는 깊이 있는 사색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를 상대로 사는 길이요, 역사 앞에서 부끄럼 없는 삶을 택하는 길이다.

특별히 그는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살았을 때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미술문화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국은 옛것을 지키는 연속성과 변화에 적응하는 순응력 사이의 긴장을 택하고 있지만, 우리는 후자에만 길들여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과 현대를 두고 속도를 조절하지만 우리는 현대만 추구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순간 그가 직감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역사와 전통의 가치는 상실한 채 정보만능이라는 현대병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책상이나 의자에 앉아 깊은 통찰과 사색은 하지 않고, 오로지 발 빠르게 대응하여 쓸 수 있는 새로운 정보 쫓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고독, 자기 공간을 잃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역사적 전통을 잇는 다리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작가의 그림 구도를 연구하고 기법의 근원부터 차근차근 배우기보다는 단지 완성된 그림의 복사본 만을 추구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어찌 거기에 역사의 숨소리를 담을 수 있으며 어찌 거기에 역사의 흔적을 남길 수 있겠는가.

하여 그는 역사와 미술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이는 역사 속에 미술 문화가 묻혀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역사적인 자기표현으로 그려내는 일에 몰두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문화유산이요, 미술문화의 흔적 속에서 역사적 시간의 숨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요구하는 기준에 자기를 맞추지 마라. 자기의 영혼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자신을 매진시켜라." (이 책 394쪽)

역사의 숨소리, 시간의 흔적 - 이석우 교수의 역사와 미술 이야기

이석우 글.그림,
인디북(인디아이),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