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재미 없으면 돈 안받습니다!

창작뮤지컬 <씨저스 패밀리>의 '벼랑 끝' 마케팅...예약자 200명 후불제

등록 2006.07.12 16:01수정 2006.07.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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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뮤지컬 <씨저스 패밀리>, '보고 나서 재미없으면 돈 내지 마세요!' 13일 후불제 이벤트를 진행한다.

뮤지컬 <씨저스 패밀리>, '보고 나서 재미없으면 돈 내지 마세요!' 13일 후불제 이벤트를 진행한다. ⓒ 김기

해외 대작 뮤지컬이 공연예술계를 과점하는 현상 속에서도, 국산 창작 뮤지컬들의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한 행보는 지난 몇 년 동안 건질 수 있었던 희망의 증거들이었다. 문화정책이 현장을 앞서간 적도 없지만, 뒷북조차 드문 현실 속에서 그나마 우리나라 문화계가 오늘에 이른 것은 현장을 떠나지 않고 천직인 양 매달려온 문화예술인들의 땀과 노력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 외국 라이선스 뮤지컬이 국내 공연예술계를 별 저항 없이 장악하고, 10월 개관 예정인 뮤지컬 전용극장도 국내 극단이 아니라 일본 극단의 1년 장기공연이 예정되는 등 국산 뮤지컬의 입지는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작은 뮤지컬 전문극단이 파격적이다 못해 과격한 마케팅을 벌이고 나서서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6월 23일부터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 '씨어터 노리'에서 공연 중인 소나기아츠(대표 김학묵)의 창작뮤지컬 <씨저스 패밀리>가 오는 13일 공연 분을 '후불제'로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a 수다쟁이 동네아줌마. "어떤 스타일로 하냐"고 묻는 원장의 질문에 "오래 가는 스타일"이라는 대답을 하는 할머니 손님. 가리봉 미용실 아니 동네 미용실 어디에서도 봄직한 풍경이다. 그 리얼리티가 <씨저스 패밀리>의 힘이다.

수다쟁이 동네아줌마. "어떤 스타일로 하냐"고 묻는 원장의 질문에 "오래 가는 스타일"이라는 대답을 하는 할머니 손님. 가리봉 미용실 아니 동네 미용실 어디에서도 봄직한 풍경이다. 그 리얼리티가 <씨저스 패밀리>의 힘이다. ⓒ 김기

후불제란 관객이 공연을 보고 받은 재미나 감동만큼 돈을 내라는 것이다. 10원부터 무한대로 후불가격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긴다는 것. 이전에도 100만원 짜리 블랙카드 판매 등 이벤트에 목숨 걸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가운데 소나기아츠의 이번 '벼랑 끝 이벤트'도 주변을 놀라게 하고 있다.

물론 전 석은 아니고 예약자 200명에 한해 후불제를 실시한다. 그러나 그것의 규모를 떠나서 이번 <씨저스 패밀리>의 후불제 마케팅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스테이지 쿼터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지는 공연예술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주최 측에서야 공격적이고 관심을 끌고자 떠올린 아이디어겠지만, 그 배경에는 우울한 창작 뮤지컬 홀대의 사회분위기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창작이냐 라이선스냐가 아니라, 그것이 관객이 지불한 돈과 시간에 충분한 보람을 주느냐가 될 것이다. 단순히 국산 창작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대할 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 <씨저스 패밀리>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미용실에서 벌어진 일을 극화한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가리봉 미용실에서 벌어진 100억 로또 소동' 정도가 될 것이다. 번화가 미용실이 아닌 가난한 동네의 허름한 미용실에서 복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만화경을 그린 것.


a 아내가 불륜으로 100억을 숨기고 있다고 오해한 사내의 술주정. 압구정 와인바가 아니라 가리봉 순대국집 드럼통 식탁이다. 하기사 인구 중 얼마나 압구정 고급 와인바를 가봤겠는가. <씨저스 패밀리>는 더 많은 서민들을 향하고 있다.

아내가 불륜으로 100억을 숨기고 있다고 오해한 사내의 술주정. 압구정 와인바가 아니라 가리봉 순대국집 드럼통 식탁이다. 하기사 인구 중 얼마나 압구정 고급 와인바를 가봤겠는가. <씨저스 패밀리>는 더 많은 서민들을 향하고 있다. ⓒ 김기

가리봉 미용실 원장 남편은 결혼한 후 5년 동안 12번이나 해고를 당한 무능력한 사내. 그러다 우연히 꿈에서 돼지도 보고, 대통령도 만난다. 게다가 꿈속에 등장한 대통령은 사내에게 복권번호라면서 6개의 숫자를 불러준다.

꿈을 깬 사내는 대단한 길몽이라 여겨 출근 전부터 아내의 미용실에 달려와서 이 사실을 말하며 일대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아내에게 꼭 복권을 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출근을 서두른다. 그러나 공교롭게 그날 사내는 12번째 해고를 경험하게 된다.


그날부터 사내는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의 셔터맨으로 전락한다. 그러면서도 주변에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강요를 한다. 그러면서 아내가 퇴짜 놓은 미용사마저 멋대로 채용하는 등 룸펜의 대표적 증상들을 보인다. 그러던 중 복권 발표 날이 되자 사내는 메모해놓은 것을 대조하면서 추첨을 지켜본다.

거짓말처럼 사내는 복권에 당첨됐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내는 복권을 사두라는 사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두부를 샀다는 것.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내는 험한 말을 아내에게 쏟아 붓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다 미용실에 돌아와서는 아내와 남성 미용사 찰스의 사이를 의심하게 되고, 급기야 아내가 찰스와의 불륜 때문에 복권을 숨기는 것이라 오해하게 된다. 사내는 어떻게든 복권을 찾겠다는 일념에 동네 사람들을 고용한다. 그들과 함께 복권을 찾기 위해서 강도 자작극을 계획하게 된다.

a 어리바리한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 강도 자작극을 계획하는 사내와 샤론리.

어리바리한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 강도 자작극을 계획하는 사내와 샤론리. ⓒ 김기

어떻게 보면 소재나 줄거리가 뻔한 듯하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느낌도 준다. 그렇다. 뮤지컬 <씨저스 패밀리>는 촌스러운 뮤지컬이다. 그렇다고 관객 대상을 중년으로 하는 신파극도 아니다. 촌스럽기는 한데 과거의 정서에서 움직이는 추억 터치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어느 구석에서인가 벌어질 수 있는 그런 얘기들이다.

그리고 코미디이다. 요즘 개그는 젊은 층에 중요한 소통의 코드가 되었고, 웃기지 않고 흥행을 기대하기란 대단히 위험한 일. <씨저스 패밀리>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웃기려 든다. 그리고 관객들은 여섯 명의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에 배꼽을 잡는다.

특히 동남아 유학파임을 자랑하는 키 크고 잘생긴 미용사 찰스의 여성스러운 수다와 재능은 없지만 섹시한 신입 미용사 샤론리,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개그로 밀고 나가는 순정파 총각 짱개의 연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a 복권을 산 장본인은 아내가 아니라, 그때 탁발온 땡초. 그러나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 돈 가방 3개를 전달하고, 씨저스 패밀리는 기뻐한다. 그래서 해피엔딩!

복권을 산 장본인은 아내가 아니라, 그때 탁발온 땡초. 그러나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 돈 가방 3개를 전달하고, 씨저스 패밀리는 기뻐한다. 그래서 해피엔딩! ⓒ 김기

그런가하면 주인공인 사내 박치기와 아내인 원장은 정극적인 연기와 노래를 선보인다. 전반적으로 코미디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라 하나의 뮤지컬로 인식하기 위한 구성상 밸런스는 무난하게 지켜지고 있다. 마치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명사인 <신의 아그네스>처럼 작은 무대에서 소담스럽게 펼쳐지는 뮤지컬의 규모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제작사가 보고 난 다음에 돈 낼 것을 결정하라고 자신감을 갖는 이유에 대해 수긍할 수 있는 작품이다. TV에서 자주 본 얼굴인 장영란이 샤론 리로 출연하고 원장 역의 양꽃님, 이혜진의 탄탄한 내공으로 극을 안정감 있게 끌어간다. 그리고 찰스역을 맡은 신예 뮤지컬 배우 함승현도 새로운 뮤지컬 재목으로 눈길을 끈다.

무대가 크다고 반드시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작은 뮤지컬 <씨저스 패밀리>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두 시간 동안 전달해준다. 우리들 바람 속에는 극중 사내처럼 대통령이 나와 복권번호를 속 시원하게 불러줬으면 하는 공상 비슷한 것도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가 그 꿈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만 것처럼 그 공상은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 로또 대박은 허무할 뿐이다. 쉴 틈 없는 웃음 속에 그 허무는 짙은 복선으로 깔려 있고, 그 허무는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서민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프기도 한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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