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를 식혀줄 의학 스릴러, <외과의사>

[서평]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

등록 2006.07.24 11:05수정 2006.07.2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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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테스 게리첸 <외과의사>의 표지

테스 게리첸 <외과의사>의 표지 ⓒ 노블하우스

나체의 여인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침대에 누워 있다. 사지를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지만, 두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의식도 뚜렷하기에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자는 '외과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연쇄 살인범이다. 그는 여자의 눈에 나타난 공포와 두려움을 바라보며 수술용 장갑을 낀다. 그리고 메스를 들어서 수술을 시작한다. 치료를 위한 수술이 아닌, 고통과 죽음을 위한 수술을.


법의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잔인함'이다. 비교적 생소한 이름인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The Surgeon)뿐 아니라, 국내에도 잘 알려진 '퍼트리샤 콘웰'이나 '제프리 디버'의 작품도 그렇다.

제프리 디버는 작품 속에서 희생자 한 명을 고열의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파이프 앞에 묶어둔다. 그런가 하면 퍼트리샤 콘웰은 희생자의 얼굴 피부를 벗긴 후 산채로 불태워 버리기도 한다.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많은 무기들이 만들어지는 이 시대에, 추리 소설의 가해자들이 사용하는 살인의 도구는 오히려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왜 이렇게 잔인해지는 걸까?

추리 소설 가해자들, 왜 잔인해지는 걸까?

그 원인 중 하나로는 범인의 동기를 꼽을 수 있다. 고전추리소설의 범인들은 대부분 재산이나 원한 등 비교적 뚜렷한 범죄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현대추리소설의 범인들은 별다른 동기 없이 '살인' 자체를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알 수 없는 망상과 이상심리에 사로잡힌 채 희생자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만족을 얻는 살인범들. 이들이 택하는 방식이 잔인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법의학과 과학수사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전추리소설의 탐정들은 '피해자가 죽게 되면 누가 이득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추론을 펼쳐 갔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현대의 연쇄살인에 적용할 수는 없다. 현장에 남겨진 미량의 증거물을 분석하는 과학수사, 범인의 신상을 파헤치는 심리분석이 이런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두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테스 게리첸의 장편소설 <외과의사>는 이런 연쇄살인과 법의학을 다룬 추리물이다. 의학 스릴러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테스 게리첸도 의사 출신 작가다. 의학을 전공하고 수년간의 의사생활 끝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

<외과의사>의 무대는 미국 보스턴.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여름, 한 여인의 시체가 그녀의 침실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현장을 조사하던 형사들은 이 사건이 몇 년 전 사바나에서 발생한 연쇄살인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수사의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동일범의 소행일리도 없고, 모방범죄라고 하기에도 힘든 정황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결국 수사관들은 사바나 연쇄살인의 마지막 희생자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캐서린 코델 박사를 찾아가서 당시 사건을 재구성 하게 된다.


풍부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묘사해

테스 게리첸은 풍부한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다. 현장감 넘치는 병원의 분위기, 목숨이 위태로운 피해자를 앞에 둔 수술실의 긴박감 그리고 살인의 과정을 추론하는 회의실의 모습까지. 테스 게리첸은 기존의 법의학 스릴러에 버금갈 만한 다양한 지식으로 사건의 파편을 흩어 놓고, 다시 끌어 모은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등장인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주요한 3명의 등장인물인 캐서린 코델 박사와 강력반의 형사 제인 리졸리, 토마스 무어. 이들은 묘한 갈등과 협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과거와 현재, 최면과 현실, 보스턴과 사바나를 오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모순처럼 보였던 단서를 끼워 맞추며 사건의 전모에 다가간다.

이중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여형사 제인 리졸리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난 그녀는 매력적이지 못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가지고 있다. 제인 리졸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 남자 형사들 위주의 강력반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건현장에 뛰어든다. 물론 그녀의 활약이 순탄하지는 않다.

제인 리졸리는 자신을 조롱하는 동료에게 분통을 터뜨리는가 하면,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캐서린 코델 박사를 질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제인 리졸리는 테스 게리첸의 후속 작품들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를 바라보는 것도 커다란 재미일 것이다.

법의학과 연쇄살인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를 연상할 수도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카페타 시리즈만큼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링컨 라임 시리즈만큼 구성이 탄탄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노블하우스 출간.

덧붙이는 글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노블하우스 출간.

외과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1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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