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주부가 무공해 배추김치 담던 날

얼굴도 모르고 지낸 이웃집에 직접 담근 김치를 드렸어요

등록 2006.07.26 16:17수정 2006.07.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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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산밭에 있는 배추밭, 주인은 일부 배추를 뽑아내 버리고 있었다.

산밭에 있는 배추밭, 주인은 일부 배추를 뽑아내 버리고 있었다. ⓒ 권용숙

유난히 벌레 먹은 배추밭이 있었다. 배추를 뽑아 다듬고 있는 늙은 노부부에게 물었다. "배추밭에 농약을 안 하셨나 보네요" 말을 건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완전 무공해 배추" 라고 하신다. 농약을 한 번도 안 했다는 말이다. 파란색 비닐봉지에 다듬은 배추를 담은 할아버지는 배달을 가신다 하시고, 할머니는 콩밭을 매야 하니 먹을 만큼 뽑아가고 2천 원만 주고 가라고 하신다.


"완전무공해"라는 말에 솔깃해 배추밭에 들어갔다. 정말 장난이 아니다. 배추 겉잎은 거의 그물처럼 갉아먹었다. 도대체 어떤 벌레들이 조그만 배추밭 하나를 초토화 시켰을까. 배추를 다듬다 말고 화가나 벌레들을 찾아 다녔다.

a 좌측부터 장흙노린재,비단노린재,칠성무당벌레,달팽이  특히 비단노린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좌측부터 장흙노린재,비단노린재,칠성무당벌레,달팽이 특히 비단노린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 권용숙

배추밭에는 진딧물 등을 잡아먹는 칠성무당벌레도 있었지만 제일 많았던 벌레는 의외로 노린재였다. 배추밭에 아예 진을 치고 짝짓기까지 하고 있다. 배추겉잎을 그물처럼 갉아먹는 범인은 노린재 중에도 비단노린재였다. 곤충으로 예쁘게만 보였던 노린재가 처음 해충으로 보였다.

a 떼어낸 겉잎이 두 배는 되었다. 그리고 속잎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채소를 고를 때 벌레구멍이 몇 개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무공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떼어낸 겉잎이 두 배는 되었다. 그리고 속잎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채소를 고를 때 벌레구멍이 몇 개 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무공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 권용숙

실로 오랜만에 배추를 뽑아 다듬어 보았다. 그동안 남들 다 하는 것인데 혼자 바쁜 척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김치를 고향집에서 가져다 먹거나 사먹었다. 그러다 배추밭에 앉아 배추를 다듬고 있는 내가 한편 대견스럽고 정말 알뜰한 주부 같아 마음에 든다.

다듬어진 배추보다 떼어낸 배춧잎이 훨씬 많다. 농약을 안 뿌리고도 깨끗한 채소를 가꾸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배춧잎을 떼어내며 아까운 생각에 별 생각을 다한다. 무공해 재배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듯싶다.

a 우리 집 베란다에 주인이 된 달팽이.

우리 집 베란다에 주인이 된 달팽이. ⓒ 권용숙

현기증 나게 땡볕에 앉아 다듬은 배추를 또 한 번 손질하며 배추 잎에 붙어온 달팽이를 배추 잎과 함께 화분 위에 올려 주었다. 배추 잎을 다 먹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모르지만 달팽이는 오늘부터 우리 집 베란다 주인이 되었다.


a 고향에서 가져온 광천토굴새우젓을 넣었다.

고향에서 가져온 광천토굴새우젓을 넣었다. ⓒ 권용숙

집에 있는 양념을 다 꺼내놓고 김치를 담았다. 소금물에 살짝 절여 깨끗이 헹궈낸 뒤 고향에서 보내온 광천토굴새우젓 그리고, 태양초 고춧가루, 육쪽마늘, 배추밭에서 뽑아온 대파, 까나리액젓 등을 넣어 양념을 만들어 양손으로 살살 비볐다.

a 당분간 김치 걱정은 없을 듯.

당분간 김치 걱정은 없을 듯. ⓒ 권용숙

드디어 무공해 얼갈이배추김치 완성. 둘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만큼 고소하고 쌉쌀하니 맛있었다. 한 가지 비법이라고 꼽아달라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배추가 아니라 노지에서 무공해로 자란 조금은 뻣뻣한 배추와 새우젓을 꼽고 싶다. 보통 김장김치 담글 때만 새우젓을 넣는데 겉절이 담글 때도 새우젓을 넣으면 감칠맛이 나며 고향냄새도 덤으로 난다.


달팽이를 떼어내며 다듬은 김치라 그런지 더 맛이 있다. 사실 그동안 옆집에 누가 사는지 얼굴도 몰랐다.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렇게 살았다. 며칠 전부터 집에 있으며 '아 우리 집 옆에도 이웃이 있었는데 모른 채 살았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 먼저 손을 내밀어 보는 거지 뭐. 잘 버무려진 배추김치를 두 접시 담았다. 그래도 무공해 배추김치라면 맛있게 먹어 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옆집 204호에서 왔어요. 무공해 배추김치가 맛있어 가져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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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용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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