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뒤 들녘에 핀 자귀꽃

아들과 떠난 작은 여행(1)

등록 2006.07.31 20:09수정 2006.07.3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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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준수 녀석 방학 숙제 중에 ‘내 고장 여행하기’란 숙제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사진 찾고 자료 복사해서 적당히 편집하면 감쪽같은 숙제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숙제를 내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그런 건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아들 녀석을 차에 태우고 구룡사 방면으로 달렸습니다.


“비 그치니 상쾌하지.”
“맞아요. 방학하고 오늘 처음 해가 났어요.”
“참 비가 많이도 왔지.”

기상 관측소 생긴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한 해의 강수량이 이번 장마 기간 동안 내린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그 많은 비에 희망을 떠내려보내고 절망을 안고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차창 밖으로 자귀꽃이 눈에 띄어 차를 잠시 멈췄습니다. 한여름 장마철 지나고도 여전히 갈기갈기 찢긴 모습으로 부는 바람에 나풀나풀 흔들립니다. 나풀대는 자귀꽃의 선홍빛이 상처 싸매던 천 조각에 묻어나던 핏빛처럼 보이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수해에 희망을 몽땅 떠내려보낸 이들의 마음처럼 갈기갈기 찢긴 채 선홍빛 슬픔을 간직하고 있나봅니다.

어느새 날아왔는지 제비나비 한 마리가 자귀꽃에 앉았습니다.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
“처음 보는 꽃인데요.”
“그럼 이 나비 이름이 뭐지?”
“호랑나빈가?”


들녘의 꽃이며 곤충들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살아온 나도 그럴진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오죽할까요. 자귀꽃이며 제비나비 이름을 알려주니 준수는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나비가 사진 찍어달라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건 아닙니다. 자귀꽃에 앉은 나비를 제대로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이 셔터를 눌렀는지 모릅니다. 오기인지 끈기인지 녀석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자귀꽃 주변을 맴도는 제비나비를 찍기 위해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어느새 녀석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배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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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앗싸, 성공했다!”

얼마가 흘렀을까? 녀석은 겅중대며 좋아했습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고 칭찬해주니 녀석은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준수야, 자귀꽃 보면 어떤 느낌이야?”
“…….”
“다른 꽃과 다른 점 없어?”
“꽃이란 생각이 안 들어요.”
“왜?”
“꽃잎도 없잖아요.”

꽃잎이 산발한 머리카락 모양이니 꽃으로 보이지 않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자귀꽃 주변에는 제비나비가 쉴 새 없이 날아듭니다. 나비를 유혹할만한 향기를 준비한 어엿한 꽃이니까요.

“꽃이니까 나비가 날아들지.”
“정말이네.”

장마 뒤 치악산 구룡사 들어가는 길목에 자귀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모진 물난리에 꿈도 희망도 다 날려버린 이들의 선홍빛 아픔을 간직한 듯 부는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습니다. 자귀꽃 너머로 보이는 계곡에선 장마로 불어난 물이 우당탕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빠, 이제 가요.”

준수의 재촉을 받고 다시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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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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