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회

등록 2006.08.01 09:12수정 2006.08.09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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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하다.
위정자들은 언제나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란 말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곤 한다. 그리고 간혹 그 말이 맞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만변의 진리처럼 생각되는 그 말은 예외적인 경우에나 적용되는 말이다. 더 이상 위정자의 폭정(暴政)이나 학정(虐政)에 견디지 못해 폭동이 일어나거나 민란(民亂)이 일어날 때 잠시 보일 뿐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소수에 의해 움직인다.
권력을 가졌든, 재산을 가졌든지 간에 극히 적은 소수(小數)가 우매한 다수(多數)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다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들의 뇌리에 왜 그러한 생각이 세뇌(洗腦)되었는지도 모르고 소수에 의해 끌려 다닐 뿐이다.

극히 적은 소수는 언제나 뒤에서 웃고 있다.
체제가 어떠한 것으로 변하던 그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떠들어대고, 과장되게 열렬하게 숭앙하는 대상으로 보이는 황제(皇帝)나 나라의 안위(安危) 역시 그들의 실질적인 관심사는 되지 못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자신들의 생존(生存)과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어떻게 하면 유지할 것인가이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다수의 눈에는 그들이 서로 경쟁을 하고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밀한 공간 속에서 만나 술잔을 나누며 좀더 끈끈한 유대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아주 역설적으로 적이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의 적이 사라졌다고 하는 순간 또 다른 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상대를 아예 짓밟아 사라지게 하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적당한 타협과 견제를 통해 그들만의 암묵적인 규칙을 지켜가며 권력으로부터의 혜택을 독점적으로 누려나가는 것이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들은 우매한 다수일 뿐이다. 갖지 못한 자들끼리 한 움큼도 못 되는 동전을 차지하기 위하여 더 보잘 것 없는 상대를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보며 즐기고 있다. 가끔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돈을 내놓는다고 떠들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자기방어의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의 노력은 집요한 것이어서 그들의 얼굴은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어왔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세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제 1 권 첫째 날 - 입보(入堡)

1.

사람의 키보다 훨씬 크게 자란 갈대가 무성한 늪지였다. 사내는 숨을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까지 늪 속에 깊게 처박은 채 호흡을 위하여 갈대 줄기를 잘라 입에 물고 있었던 것마저도 물속으로 잠기게 하고 숨을 멈추었다.

동시에 모든 동작을 멈췄다. 쫓는 자들의 이목을 가리려고 뛰어든 늪지는 오히려 이제 그의 시력도, 청각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갈대밭을 헤치며 다가드는 미세한 물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촉감만이 그가 가진 오감(五感) 중 마지막 남은 감각이었다.

그리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그의 본능. 물 밖에서는 미세하나마 소리가 날 터이지만 진흙이 한치 앞도 보지 못하게 하는 늪지 안에서는 소리마저 진동으로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살아남기 위한 절대 필요한 생존본능이었다.

추적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물을 밟고 다가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그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는 머릿속으로 셋을 세는 동시에 그의 머리와 몸은 느닷없이 늪지에서 솟구쳐 나왔고, 그의 왼쪽 소매 속에서 쏘아 나온 한자 정도 길이의 소도(小刀)는 갑작스런 변화에 화들짝 놀라 몸이 경직된 상대의 목을 긋고 있었다. 빛이 번뜩인다고 느끼는 순간 엷은 혈막(血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치 홍예(虹霓:무지개)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흑의 경장 사내가 느낀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세상에서 남길 마지막 단발마라도 지르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을 베어버린 소도로 인하여 그의 목울대에서는 헛바람과 함께 선혈이 쏟아져 나왔다. 유일하게 들린 소리는 그의 신형이 늪지에 통나무처럼 처박히는 소리였다.

철퍼----덕----!

실수였다. 상대를 베고 나면 상대를 재빨리 받아 들어 소리 없이 늪지에 잠기도록 했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몸 역시 조금 전과 같이 더 깊은 늪지로 스며들어야 했던 것이다. 쓰러지는 상대를 받아들지 못한 것은 그의 목줄을 정확하게 베는 순간 머리에서 떨어지는 흙물이 잠시 시야를 가린 탓이었다.

사내는 일단 뛰기 시작했다. 그는 갈대밭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숲 쪽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홍육(洪六)이 당했다! 놈이 갈대밭에 있다."

그것뿐이었다.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갈대들은 짓누르는 인간들의 육신에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 몸을 뉘이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쫒는 자의 수는 적어도 일곱 명 이상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쫒듯 움직이고 있는 갈대밭을 향해 반원을 그리며 좁혀가고 있었다.

'지독한 놈들!'

그는 몸을 바짝 숙이며 뛰고 있었지만 갈대가 움직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두시진 전에 빠져 나온 숲으로 다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추적자들을 따돌리기엔 훤히 보이는 물가보다는 나무가 무성한 숲이 오히려 나았지만 종적이 발견되면 그물처럼 포위를 당하는 단점이 있다 해도 할 수 없었다.

"퇴로를 막아라.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 그의 귓가로 추적자의 수뇌로 생각되는 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도망을 가면서도 기회만 닿는다면 저놈의 목줄을 반드시 따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덧붙이는 글 | 오늘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분들의 뜨거운 호응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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