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팔수의 독백

평전에 못다 쓴 배호 이야기 11

등록 2006.08.02 12:28수정 2006.08.02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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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전집이 10개의 CD와 약전(略傳) 1권으로 최근 시중에 나와 판매되고 있는 요즘, 많은 배호 팬들이 그 사실을 기쁨으로 반기고 있다. '배기모'(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도 한층 더 성황인 느낌이다.


배기모 회원들은 매달 한 번씩(매월 셋째주 목요일) 서울 종로 2가의 파노라마 뷔페에서 만나는데, 나 또한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만남의 장소가 종로 2가인지라 인천 사는 나는 1호선 전철을 타고 찾아가 배호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보곤 한다. 이것은 내 인생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지난 7월 20일 모임에는 뜻깊은 일이 있었다. '전선야곡'의 가수 신세영(81)옹이 나와 건강한 음성으로 '전선야곡'을 들려주었고, 태진아의 '옥경이'까지 불러주었다. 배호의 스승이며 외숙부인 김광빈옹과의 친분을 이야기한 그는 천재가수 배호의 요절을 몹시 아쉬워했다.

a <전선야곡>을 열창하는 신세영옹

<전선야곡>을 열창하는 신세영옹 ⓒ 김선영

앞서 6월 15일에는 배호가 드럼을 연주하던 시절에 트럼펫 연주를 했던 이현구(62)씨가 나와 배호의 노래를 연주해 주었다. 그는 배호와의 그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이후 7월 30일 배기모 홈페이지에 '어느 나팔수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배호에 관한 기억을 담은 글을 올려주었다. 그 글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살아∼살아∼살아서 무엇을 했던가?
1945년에 태어났기에 해방둥이 나팔수라는 말을 자주 해오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오랜 세월 동안 연주 활동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던 시절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조명 아래 화려한 무대에서 여러분과 함께 했던 그 많은 세월…
현재도 저는 40여 년 무대지기 나팔수이니까요.
어느덧 뒤를 돌아다 볼 만한 나이가 된 듯싶기에… 모노드라마에 나오는 어느 배우처럼 저의 독백을 털어놓을까 합니다.

시골에서 엄하디 엄한 부모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소년 시절부터 끼가 있어서였던지 악기를 쉽게 구경키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나는 노래를 즐겨 불렀고,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음정도 제대로 맞지 않던 고물 하모니카를 뒷주머니에 즐겨 꼽고 다니곤 했던 것 같습니다.


넉넉지는 않았으나 가업으로 정미소를 하시던 저의 부모님에게는 큰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자식이었는가 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자식을 키워낸 이 나이가 돼서야 알게 됐습니다. 큰자식이었기에 어떤 뚜렷한(?) 장래를 크게 기대하셨을 것임에 틀림없었을 텐데…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학교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었으니… 그것을 이해하기에 저의 부모님은 무척이나 힘들어하셨답니다. 혼나기도 많이 했고 심한 마찰이 많았었습니다. 학교에서 밴드부 요원의 실력으로는 꼭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까지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집에서는 항상 대우를 못 받는 처지가 돼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 시작한 그 트럼펫이 이토록 끈질기도록… 평생 동안 나를 붙잡을 줄은 그때는 생각질 못했었지요. 트럼펫 소리는 사람의 심장을 두들기는 소리랍니다. 내가 아끼는 어느 후배님은 트럼펫 소리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대학 시절까지 정말정말 트럼펫이 좋아서 트럼펫만을 연주했습니다. 악기에 침이 고이면 고이는 대로, 입술이 터져 피가 고이고… 좋은 연주자가 있는 곳이라면 찾아가 듣고 배우고 물어보고… 조금 만질 줄 아는 피아노 외에는 트럼펫만을 연주했지요.

모년 모월 모일… 국악인들이 얘기하는 득음이랄까요? 트럼펫을 통하여 나 나름대로 그 어느, 그 어떤 소리를 얻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불어넣는 입김을 통해 나오는 소리에서 혼신이 담긴 듯한, 꽉 찬 그 어느 소리에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영화음악, 대중가요, 세미클래식, 추억의 노래, 재즈음악 등… 다양하고 듣기 쉬운 파플러 음악을 나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연주해 오는 동안, 저는 잊지 못할 여러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숙생> 작곡자로 알려진 아코디언 연주자 김호길님. 한 세대 쇼 악단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상우님, 고계화님, 색소폰 명 연주자 이봉조님, 심봉월님, 작곡가 황우루님, 성영택님, 송해님, 남보원님, 황철님, <파도> 작곡자 김영종님,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불세출의 가수로 그 이름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그 님… 드럼 연주자 배만금(배호의 본명)님과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그 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게 한답니다. 언제나 연주할 때면 고개를 살랑살랑 저어 가며 흥겨워하던 연주 솜씨. 브러시를 너무나도 잘 사용했던 그 님의 모습… <고엽> <샤레이드> 등 샹송을 연주할 때면 특히도 연주인으로도 충분하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그 님의 음악성이 지금껏 불세출의 가수 배호님으로 남아 있기에 충분함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거만하리 만큼한 반듯한 자세, 철철 넘치는 듯한 멋, 깔끔했던 그의 정신과 태도는 나에게 많은 것을 터득하게 만들었죠. 아직까지도 연주를 하고 있는 나에게 큰 지침의 한 획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 후 배만금님은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많은 노래를 통해 그 님의 음악성과 아쉬움의 엑기스만을 세상에 남겨 놓고 떠난 것입니다.

60년도 중후반쯤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럼 연주자 아트브레키 내한 공연 때 시민회관 공연장에서의 만남이 배만금님과 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답니다. 누구의 부축으로 공연장에 온 그 님… 얼굴이 몹시 부어 있었고 병색이 짙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려웠던 시절… 그 님과 같이 했던 연주 생활에서 얻은 수십 가지가 지금껏 연주에 임하고있는 나를 존재하게 합니다. 연주란 누구에게나 감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 서로 얘기했던 그 말은… 지금의 나에게 크고 큰 공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언제나 자신 있는 연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한 혼이 담긴 연주인이 되었나 봅니다.

40여 년을 연주 생활로 살아왔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납니다. 군악대 생활이며 군예대 생활, 4년간의 동남아 순회 공연, 수년간의 악단장 생활, 10년 동안의 미국 유학 생활 등등… 주마등같이 스치는 지난 일들이 기억나는군요.

특히 몇 해 전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참수 당해 그의 시신이 부산의료원에 도착했을 시에 <고인에게 바치는 노래>를 작곡하여 그의 영전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던 것은 큰 의미가 있었던 연주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도 저의 연주 활동을 말리시었던 부모님들이었으나, 두 분이 묻혀 계신 묘소에 가서 그분들께 연주해 드린 것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들 때문에 나의 존재가 있기에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나팔… 그럴 줄 알았으면 말리지나 말았을 건데…“

어느 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어느덧 환갑을 맞은 해에 나는, 사후 시신을 충남대 의과대학에 기증하였습니다. 신장 1m79cm, 체중 80Kg…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깨끗한 몸으로 후세들의 건강 증진과 의학 발전 및 의학 연구에 요긴하게 쓰여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해방둥이 나팔수, 통일의 그날까지 연주하리라!"

이렇게 외치면서 살으렵니다. 어느 나팔수의 독백이었습니다.


a 배호의 노래를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이현구씨

배호의 노래를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이현구씨 ⓒ 김선영

a 이현구씨의 트럼펫 연주를 감상하는 배호 팬들

이현구씨의 트럼펫 연주를 감상하는 배호 팬들 ⓒ 김선영

아트브레키 내한 공연 때 배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이현구씨는 그때의 대화 한 토막을 이렇게 소개해 주었다.

"나이는 제가 아래지만 만금아 하고 불렀었지요. 그날 만금이라고 부르는 나한테 배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만금이가 아니라 배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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