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상 통일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평] 허영철의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등록 2006.08.02 14:54수정 2006.08.02 21:45
0
원고료로 응원
한 사람의 삶은 곧 역사다. 어떤 모습이로든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까닭이다. 개인적인 일을 비롯해서 그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역사와 맞물려 있는 탓이다. 역사적인 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와 늘 동행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한 행동을 두고서 평가하는 역사적인 잣대는 엇갈릴 수 있다. 역사는 늘 힘을 가진 자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실패한 행동들이 단죄를 받고 죄인으로 몰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게 남과 북으로 나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역사적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거짓으로 꾸며낸 것들이 다 밝혀지고 있다. 왜 그 당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일인지 알 수 있는 때가 됐다. 그 까닭에 이념적으로 죄인취급 받던 이전의 사람들이 이젠 당당한 역사적인 주체로 인정받고 있다.

허영철, 남과 북 하나 되는 정부 구성 위해 애쓰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겉그림.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겉그림.보리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삶도 그러하다. 192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48년 해방과 더불어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 내 단독정부를 고집하는 이승만 정권을 규탄한다. 그래서 남조선노동당에 들어가, 오직 남과 북이 하나 되는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쓴다.

하지만 1949년 2월에는 지명수배를 받아 충남 안면도로, 춘천으로, 그리고 단양으로 피신한다. 그해 6월에 김구가 암살되자 눈물을 머금고 서울시 방어전에 뛰어들었다가,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여 중국에 있는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운다.

그 뒤 남한 내 각 지구당 사업을 지원할 공작원 훈련을 받고, 1954년 7월 낚싯배를 타고 법성포에 도착한다. 그 때 그의 이름은 '전귀환 간첩'이었다. 하지만 1955년 7월20일 붙잡히고, 그 해 9월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 미수'라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는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6년이 지난 1991년 2월26일, 형 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허영철이 직접 구술하고 쓴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보리·2006)에 낱낱이 기록돼 있다.

"흔히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하지? 하지만 그건 아주 잘못 알려진 거야. 오히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소련은 '후견제'라는 것을 제시했어. 미국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 취급하는 것이지만, 소련의 후견제는 달랐지. 우리나라가 자주 국가로 안정될 때까지 최장 5년 동안만 정치적인 후견을 하겠다는 제안이야. 그 뜻이 얼마나 정당했는지 늘 미국의 우방이었던 영국까지 찬성하고 나왔을 정도야."(79쪽)


6.25전쟁, 중요한 건 누가 '먼저'인가가 아니다

그가 그토록 남로당 조직원으로 가담하여 북한과 부안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이유, 김구와 함께 미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던 이유, 중앙당학교에서 입학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배워 인민위원장직을 맡았던 이유, 전귀환이란 이름으로 바꿔서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이유, 그것은 오직 하나였다. 남과 북이 둘이 아닌 하나의 통일정부를 이룩하는 그 바람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6·25 한국전쟁의 책임을 '남침설'이니 '북침설'이니, 또는 미국의 '남침유도설'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반박을 한다. 그것은 1948년과 1949년부터 이미 38선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부터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총성이 오갔고, 대대 단위까지의 큰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하루만 딱 떼어 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날 갑자가 터진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자꾸 6월 25일만 특화해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묻는데, 그러면 내가 대답해요. '전쟁의 처음은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그러면 누가 평화 정책을 추진했는지, 누가 도발 정책을 추진했는지 그것을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고요."(119쪽)

중요한 것은 남쪽이 먼저냐, 북쪽이 먼저냐 하는 게 아니라, 누가 '조선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본질을 위배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일관되게 평화통일을 주장해왔지만, 남쪽에서는 아침은 해주, 점심은 평양, 저녁은 압록강 변 신의주에서라는 구호 아래 무력도발을 연이어 사용하지 않았느냐?'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남과 북, 하나 되지 못한 책임은 미국에 있다

허영철의 말을 종합해 볼 때,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못한 책임은 분명 미국에게 있다. 그들이야말로 조선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들이요, 오직 무력도발만을 일관된 정책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부시 정부가 추진하려하는 무력시위와도 그 맥이 맞닿아 있는 꼴이다. 그렇지만 이게 무력시위로 될 일인가?

젊은 시절을 간첩이란 죄목으로 옥중에서 다 보내고 이젠 백발이 무성한 몸으로, 출소한지 16년이 지난 허영철. 노구의 몸이 되어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지만, 오직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씨앗을 뿌리는 일에는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다 보태고 있는 그는 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집회라든지, 8.15민족공동행사, 맥아더동상 철거시위 등에도 빠지지 않고 있다.

왜 그토록 그가 미국과 미군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는지, 왜 그토록 통일을 온 몸으로 껴안고 있는지, 역사적인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그는 항상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보리,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2. 2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