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하고 도장찍는 일이 '행정체험'?

경험·경력 원했던 대학생들 대부분 단순 노동만

등록 2006.08.04 18:48수정 2006.08.05 11:16
0
원고료로 응원
a 행정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중인 대학생들의 모습.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복사와 업무 보조등의 단순 노동이다.

행정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중인 대학생들의 모습.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복사와 업무 보조등의 단순 노동이다. ⓒ 김귀현


공무원이 꿈인 대학생 최영준(가명)씨는 여름방학을 맞아 한 지자체에서 시행하는 '대학생 행정체험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경쟁률은 무려 10 대 1. 하지만 최씨는 운좋게 선발자 명단에 들었고 행정 업무를 직접 체험한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해당 관공서인 A시청에 출근했다.

그러나 실상 최씨가 시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씨는 다른 2명의 대학생과 함께 주택과에 배치됐다. 그러나 최씨에게는 업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엑셀 프로그램을 다룰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간단한 복사 업무만이 최씨의 유일한 일이었다. 결국 최씨는 열흘만 다니고 더이상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맞춰 각 지자체 등이 대학생을 위한 '행정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부실해 대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미리 행정 업무를 체험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대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최씨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킬 일이 없다"며 아예 방치해두거나 행정 업무보다는 사무보조 등 단순작업만으로 하루를 채우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사례①- 단순작업만 체험] "배운 일 하나 없이 도장 찍기만 선수됐어요"

B시 공원 관리사업소에서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를 한 김모(24)씨는 공원 순찰 업무를 맡았다. 공무원 한 명, 공익요원 한 명과 같은 조가 되어 코스에 따라 순찰을 하는 게 임무였다. 그러나 김씨는 같은 조 공무원과 함께 일한 적이 없다.

"장래 희망이 공원시설 관리였기 때문에 공원관리사업소에 배치됐을 때는 기대가 많았어요. 담당 공무원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죠.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너희들끼리 돌라'면서 종적을 감추기 일쑤였습니다. 며칠 후에는 공익요원까지 볼 일이 있다는 핑계로 빠져나가 결국 벤치에 가만히 앉아 근무시간만 채우고 집에 가는 생활이 계속됐어요."


[사례②- 인맥으로 선발] "경험보다는 돈벌기 위해서"

a "서울시청에서 일하고 싶어요" 공무원은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다. 서울시청은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시청에서 일하고 싶어요" 공무원은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다. 서울시청은 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 김귀현

투명하지 않은 선발과정도 내실없는 교육을 만드는 원인이다. 인맥에 의해 정원 외 몇 명을 공개추첨과 상관없이 선발하는 지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모(20)씨는 지난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올 여름방학까지 내리 C시청에 배치돼 일할 수 있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덕분이다.

이씨는 가까운 동사무소에서 세 차례 일을 했지만 그가 한 일은 각종 문서에 도장을 찍는 일뿐이었다. 이씨는 "도장찍는 일 외에는 행정 업무와 관련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서 "솔직히 경험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한다. 3·4 학년이 되면 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례③- 보직은 '대타'] "내가 쓴 글이 공무원 이름으로 게재"

D시에 사는 신모(25)씨 역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생 행정체험 연수생으로 선발됐다. 그런데 신씨가 인근 동사무소에서 받은 보직은 '대타'였다. 뚜렷이 정해진 업무는 없고 단지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한 것이다.

"정말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해당 구청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담당 부서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담당 공무원이 저한테 그 글을 쓰라고 맡기더군요. 하지만 그 글을 잡지에서 보았을 때는, 담당 공무원의 이름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

신씨는 "프로그램이 따로 없으니 담당 공무원을 잘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나의 경우와는 다르게 내 친구는 담당 공무원을 잘 만나 일도 많이 배우고 보람도 느꼈다고 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부서 따라 공무원 따라 프로그램은 천차만별

a 서울시 모 구청의 민원실. 민원업무를 직접 체험한 학생의 경우는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서울시 모 구청의 민원실. 민원업무를 직접 체험한 학생의 경우는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 김귀현

신씨의 말처럼 모범적인 행정체험 사례도 있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 한 관공서에서 민원업무를 보았던 대학생 정유진(21)씨는 "행정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알 수 있었고 민원 처리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 시청 세무과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학생 유승우(23)씨는 "세금과 과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면서 "세무사를 준비 중인데 아주 좋은 경험이 됐다"고 긍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결국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각 지자체의 담당자나 프로그램에 따라 다른 셈이다. 왜 이런 것일까. 현직에 있는 공무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모 시청에서 근무하는 행정 담당 박모씨는 "(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한지 몇 년 되지 않았고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행정체험 효과 및 만족도가 부서별로 천차만별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일단 뽑아놓고 각 부서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로 인해 일선 공무원의 부담이 가중되고 결국 프로그램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업무 중심의 공동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해당 공무원이나 전문가들은 대학생들을 위한 독자적인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남시청 행정 체험 담당공무원은 "전문적인 행정업무를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은 무리라서 학생 입장에서는 불만이 생길 수 있다"면서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그들이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1:1 컨설팅을 실시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대학생에게 행정 체험은 공직이 적성에 맞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없애거나 축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공무원과 대학생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정착하려면 업무 중심의 공동 작업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김귀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입니다.

덧붙이는 글 김귀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