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아웅산 수지에 대한 미국적 시각을 경계한다

등록 2006.08.08 18:02수정 2006.08.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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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걸프전쟁 당시 한국을 방문한 구 소련 국영 언론사 사장은 걸프전쟁에 대한 한국 언론의 보도가 지나치게 미국 편향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한국인들의 미국 편향은 비단 국제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인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역사 교육이 한국사·중국사·일본사나 서양사(주로 미국과 유럽)에 편중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중동·중앙·동남·남아시아나 아프리카·남미 등에 대한 역사인식이 독자적으로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국가 혹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역사인식은 한국 학계의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미국측 연구성과의 차용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단적인 예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인들의 세계인식은 사실상 한국인 자신의 인식이라기보다는 미국인의 인식을 거의 대부분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의 직접적 접촉이 빈번한 중국·일본 등에 대해서는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만, 동북아를 벗어난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과 거의 유사한 인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인식상의 편향은 미얀마(버마)와 아웅산 수지에 대한 평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분야에 있어서도 오늘날 한국인들은 독자적 인식을 갖지 못한 채 미국인들의 시각을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미얀마 정권을 반민주적 정권이라고 비판하고 또 아웅산 수지를 민주화 투사 겸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칭송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각은 어디까지나 미국적 가치관을 따른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은, 반미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미얀마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미국적 시각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부 한국인들이 한편으로는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눈을 빌려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모순된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같은 오류에서 벗어나 미얀마를 좀 더 올바로 인식하려면, 미국이 가르쳐 주지 않은 부분까지도 한국인들이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미얀마 정권이 군사정권이라는 사실과, 아웅산 수지가 민주화 투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얀마와 아웅산 수지를 평가할 때에는 그것 외에도 다른 많은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충분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다음에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럼, 한국인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미얀마와 아웅산 수지의 또 다른 측면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 이 글에서는 8가지 점만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미얀마 사회를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다분히 미국적 사고방식의 표현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미얀마 민주화를 명분으로 미얀마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의 인식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일 수 있다.

미얀마를 압박해 온 미국은 2003년 7월 29일 소위 ‘버마 자유 및 민주화법’(Burmese Freedom and Democracy Act)을 제정하여, 수입 금지, 송금 금지, 정부 자산 동결 등의 경제제재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미얀마 압박을 위해 소위 ‘인권’이나 ‘민주화’ 같은 구호를 내세우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미얀마를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구도로 인식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미얀마 문제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한국인들까지 미국의 인식을 그대로 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둘째, 19세기 초반 이래 미얀마 사회가 처한 핵심 과제 중의 하나가 외세 극복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미얀마족이 세운 알라웅파야 왕조는 1767년에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를 정복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19세기 서세동점 시기에는 조선·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양 자본주의 국가의 공세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미얀마를 압박한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1824·1852·1885년의 전쟁을 통해 1886년에 비로소 미얀마를 자국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영국인들의 식민 지배는 미얀마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영국 식민당국은 미얀마족과 대립적인 구르카족·까렌족 출신으로 구성된 군대를 만들어 다수 종족인 미얀마족을 다스렸다. 또 영국은 인도인 상인 및 기업인들을 미얀마로 끌어들여 식민지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영국 식민통치에 맞서 1920년대부터 미얀마에서는 민족주의가 격렬해지게 되었다.

1948년 1월 4일에 ‘버마 연방’이 탄생하기는 하였으나, 미얀마의 자주성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버마 연방은 기본적으로 영국의 간여 속에서 세워진 것이며, 1962년 네윈의 군사혁명 이후 중립외교를 지향하는 상황 하에서도 미국·영국 등 외세의 압박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셋째, 미얀마 정권이 군사정권인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외세의 강도 높은 압박 속에 있는 약소국에서 비교적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국력을 국토방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의 핵우산 위협 하에 놓인 북한이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변형된 군사정치를 실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미얀마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중립외교 노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한 일이라는 점이다. 국제기구 가입을 최소화하고 편향된 외교노선을 거부하는 미얀마의 태도가 미국의 눈에는 자국의 패권을 거부하는 ‘불량국가’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아웅산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Aung San, 1914?~1947.7.19) 장군이 미얀마의 독립투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자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변절자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아웅산의 일생을 간략히 개괄해 보기로 한다.

아웅산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반영(反英)운동에 참여한 독립투사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그는 2차례의 전향을 보였다. 처음에는 영국과 대립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 1942년 일본군의 미얀마 침공 당시 그는 미얀마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측에 협력했다. 그는 그 공로 때문에, 버 마우가 이끄는 괴뢰정부(1943~1945년) 하에서 국방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적이 있다.

그러다가 전황이 일본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아웅산은 입장을 다시 바꾸었다. 자신이 이전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영국과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1945년 3월 육군 소장이던 그는 미얀마 국민군을 이끌고 영국 등 연합군에 협력하였다. 그 덕분에 그는 1946년말 미얀마 행정참사회 부의장(총리 역할)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상관은 영국인 총독이었다.

아웅산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협력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1945년 3월 이후 영국과 협력한 것은 민족적 관점에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아웅산을 ‘영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미국·영국 등이 아웅산의 딸인 아웅산 수지를 보호하는 이유의 한 가지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웅산이 한때 반영운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친영주의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그의 핵심 아이덴티티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친영파에 불과한 것이다. 서방 세계가 그를 칭송하고 그의 딸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섯째, 아웅산 수지가 친영파인 아버지에게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어디서 공부를 했느냐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웅산 수지는 15세 때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1988년 귀국 후에도 계속 영국 등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았다. 미얀마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의 지원을 받아 미얀마 정권에 대항해 온 것이다.

아웅산 수지는 자신이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민족자주의식과 반영감정을 품었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지 않는 한, 그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친영파일 것이라는 의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일곱째, 미얀마 군사정권이 국민적 지지를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반민주 정권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경제적 피폐에 있는 것이다. 민주화와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정권도 경제에 실패하면 국민적 지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이 인식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가 경제적 피폐를 겪는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서방세계의 경제제재 때문이기도 하다.

여덟째, 한국인들은 한국 내의 버마 민주화 운동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그들을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미국 시각에서는 민주화 투사이지만, 미얀마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또 한국 내에서 활동하는 미얀마 민주화 단체들이 흔히 ‘버마 민주화’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버마가 영어식 표기라 하여 이제는 미얀마라 부르고 있는데, 아직도 자신들을 영어식 표현인 버마로 부르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있다면, 그들의 민족의식을 한번쯤 검토해 볼 필요가 잇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미얀마를 올바로 인식하려면 단순히 미얀마 정권이 군사정권이라는 점과 아웅산 수지가 민주화 투사라는 점만을 고려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요소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미얀마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미얀마 문제를 재인식하는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인들은 한국인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될 것이다. 미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이 자주의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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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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