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썩은 놈' 소리, 너무나 그립습니다

등록 2006.08.09 21:08수정 2006.08.1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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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까지만 해도 해맑던 하늘이 갑자기 사방에 먹물을 뒤집어 쓴 듯 까맣게 변했다. 장대비를 쏟아 부어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길옆, 작은 웅덩이에 사정없이 내려 꽂히는 빗물의 파장을 보고 있으려니, 아스라히 연무에 엉키어 밀려오는 고향산하가 동공에 맺혀온다.

"썩은 놈!"

이 욕은 어머니의 욕보따리 중 서열 제1호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욕 중의 하나이다.

어머니의 욕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썩은 놈'의 과거형에서부터 시작된 욕의 드라마는 감정이 최고조로 악화되면 '꼬꾸라져 디질 놈'의 미래형으로 이어진 후에야 비로소 종막을 내리게 된다.

이쯤되면 어머니는 대개 지쳐 있게 마련인데, 대상은 주로 우리집 다섯 식구이며, 어머니의 독백성 모노드라마의 관객은 오직 나 혼자에 국한되어 있어서 다른 피해자는 없다. 단지 나는 다소의 고달픔을 잘 견디어내는 편이어서, 오히려 돌아서면, 씻은 듯이 웃어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40년도 더 지난 오래 전 이야기다. 그날도 어머니는 나에게 그 욕을 먹일 구실을 만들어 주셨다.

"빙헌(병현)아 내일 썰물 때를 맞추어 말년네 집으로 나와라 잉? 잊지 말고 꼬오옥!"


그해 음력 7월 22일은 미세기로(조수차가 가장 낮은 날로 바닷길이 육로로 열려 큰 개를 건너기엔 조금때를 많이 이용함), 하루 전 어머니가 개 건너로 봇짐장사를 나가서 환물한 곡식 보따리를 받으러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줄포5일장에 못 나오는 개 건너 주민들에게 주로 생필품을 공급하고 대신 곡물을 받아오는 틈새장사를 하셨다. 봇짐장사 지역을 굳이 내지(육지)가 아닌 개 건너로 택한 이유는 타의반 자의반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오직 자존심 하나로 버티어오신 유학자였던 터라 어머니는 체면유지(?)상 얼굴이 안팔리는 '개 건너 장사'를 택하신 것이며, 생계유지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시골 해안가 마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잡이로 유명했던 서해 칠산바다에 접한 작은 포구 줄포에서 다시 내지 쪽으로 약 1㎞쯤 들어가 위치한, 야산과 평야로 어우러진 작은 마을 '소해'가 바로 나의 중학 3년의 꿈을 키워 준 고향마을이다.

지게에 바저구를 얹고, 마중 나갈 채비를 마치자 마루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뎅~ 뎅~" 2시를 알렸다. 마을에서 두부 모를 잘라 놓듯 곧게 뻗은 간척지 농로를 따라 말년네 집까진 2㎞정도 된다.

적당히 잘 다져진 논 뚝길을 따라 걷노라면, 볏잎은 갯바람에 일렁이어 비단폭처럼 여울을 이루었고, 볏잎 부딪히는 선율과 비릿한 갯바람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새 높게 쌓아올린 방파제 뚝에 이르는데, 그 곳에 말년이네 집이 있다.

무더운 여름 만조시엔, 친구들과 방파제 수문통에 멱을 감으러 자주 갔다. 아득히 펼쳐진 칠산바다로부터 밀려오는 바닷물은 사리 땐 뚝의 8부능선까지 출렁인다. 텀벙텀벙 다이빙하기엔 적격이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입술이 청파래가 되도록 헤엄을 치다가 어느 사이 간조가 되면, 석양에 빨간 노을이 들 때까지 농발기(농게)며 맛살 등을 잡으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나는 확 트인 들길을 상쾌히 걸으면서, 장마 끝에 하부천의 참게를 잡겠다는 기대에 더욱 설레여 있었다. 쉰을 넘기신 어머니가 유달리 좋아하시는 게장에 넣을 참게를 잡기 위해서이다. 어머니가 게딱지에 밥을 비벼서 후루룩 소리를 내시며 "참 맛있게 잘 먹었다" 하시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밟혀온다.

상부천에서부터 중부천을 굽이쳐 내려오던 흙탕물이 하부천 수중보 근처에선 유속이 완만해져, 펑퍼짐한 양쪽 갈대숲 사이로 허물어진 콘크리트벽 틈바귀엔, 으레 흙탕물을 피해 물 밖으로 기어오른 참게 한두 마리씩이 붙어 있었고, 올라오는 족족 잡아내는 재미는 더욱 옹골졌다.

그러나 오늘따라 수확이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참게 잡는 재미에 골몰하여 시선을 집중하다가 잡아 논 참게 한 마리가 다리끼 문 틈바귀로 바스락거리며 빠져나가는 것을 다시 밀어 넣으려는 참이었다.

"썩은 놈!"

낮게 터져 나오는 탄식과 함께 내뱉는 듯한 한 마디.

어머니는 그동안 내가 본분을 깜박 잊고 게 잡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나를 기다리다 지쳐 손수 곡식보따리를 이고 오셨다. 기진한 어머니가 그 보따리를 내박치듯 등 뒤에 내려놓고는 봇짐에 기대어 스르르 눈을 감아버리시던, 그 무표정했던 어머니의 얼굴을 나는 평생동안 잊을 수가 없다.

기운을 추스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전 같으면 벌써 몇 번씩이나 곱씹어 들었어야 할 어머니의 욕은 끝내 들리지 않았고, 지게등짐 뒤에서 "후유~" 하시며 내쉬는 깊은 한숨소리만 간간이 귀청을 때려왔다. 그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후로 어머니는 무릎 관절에 이상이 와서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 이웃출입을 하시게 되었다. 이듬해에 큰 도시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나는 졸업반이 되어서야 여름방학에 집에 내려오게 되었지만, 달라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전에는 "내 새끼 왔는가" 하시며, 뛰쳐나오시던 어머니가 이날은 내가 대문을 들어서자 마주 보이는 대청마루 문설주에 기대앉아서 겨우 손짓으로 어서 오라고 맞아주셨다.

나는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며 어머니를 덥석 보듬어 올리면서 끝내 흐느끼고 말았다. 어머니의 몸은 너무나도 가벼웠고, 무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
"엄어이, 욕좀 히봐. 욕 잘힛잖이어~? 지발 욕 좀 히보라니께~ 응!"

나는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잔잔한 눈매로 쓰다듬듯 아들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굳게 다문 입과 미동도 없이 망연히 바라만 보시는 어머니의 눈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이윽고 옆으로 돌리시는 어머니의 눈가에 한가닥 눈물이 고이어 있을 뿐이었다.

물구덩이를 치고 달아나는 오토바이 뒤엔 뿌연 안개비가 자욱히 눈앞을 가리어 온다. 나는 한없이 남녘하늘만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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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외국어번역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계층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접하기도 하여 만평을 적어보고자 회원에 가입했고 그간 몇 꼭지의 기사를 올린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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