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회

등록 2006.08.10 08:35수정 2006.08.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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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정중히 말했다.

"사해(四海)가 모두 친구라 하나 보주께서는 번잡함을 싫어하시어 몇몇 가까운 분만을 모시고 조촐히 보내시고자 하시오. 본 보로서는 이런 연유로 귀공(貴公)을 모시지 못하오니 넓은 마음으로 양해하시기 바라오."


말을 하던 선원의 얼굴에 잠시 긴장된 빛이 스쳤다.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깃발과 승교가 보이자 그는 이 배에 자신들이 모시고 갈 마지막 일행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이제 좀 물러나 주시겠소?"

옆에 묵묵히 있었던 선원 한 명이 딱딱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 따라 위협적으로 들릴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뒤를 돌아다 본 미청년은 잠시 눈을 찌푸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빙그레 미소를 띄웠다.

"아…, 괜찮소. 소생이 저 분들 일행이라면 승선할 수 있겠소?"


왜 이리 귀찮게 구는가? 한 주먹에 서호 안으로 처박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이미 승선해 있는 손님들도 호기심을 보이며 이쪽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작자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수작이라는 것이 아마 저들이 승선할 때 슬쩍 끼어 들어가겠다는 심사가 분명했다. 저분들이 누군데 이런 작자를 알까? 더구나 일행이라니…. 일행이라면 같이 올 것이지 슬쩍 올라타려다 걸리니까 갑작스럽게 변명하는 것이 세살 먹은 어린애라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뻔한 수작이지 않은가?


"일행이건 아니건 간에 일단 물러나 계시오."

짜증이 섞인 말투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저기서 오는 손님은 매우 까다롭다고 이미 들은 바 있어 자칫 이 자로 인하여 심한 추궁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힘으로라도 이 부교에서 밀어내야 할 판이었다.

부교는 넓었고 저 손님들은 말을 탄 채로, 승교에 오른 채로 지금 오는 그대로의 행렬을 유지해 배에 오를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자가 떡 하니 가운데 버티고 있으면 지나가지 못할 것이고 자신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어…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만약 저분들이 소생을 일행이 아니라 한다면 그때 가서 물 속으로 처박아도 원망 않겠소."

그의 말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말이어서 선원들은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만약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몰아내는 것은 큰 잘못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일행이 아니라면 오고 있는 손님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더라도…."

그들의 실랑이는 끝나지 않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광검 풍철한이 기이한 눈빛으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식…! 분명 그 놈인 것 같은데…?'

흑의를 벗어버리고 문사 풍의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 때문에 '절대'라는 수식이 붙은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두 번 정도 언뜻 본 것도 그가 확신할 수 없게 만든 이유였다. 그는 급히 자신의 옆에 있는 설중행을 바라보았다.

분명 저 문사 풍의 잘 생긴 작자는 이놈을 은밀히 도와주던 그 놈이 틀림없었다.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철기문의 구천각 인물 열두 명 중 결정적인 순간에 세 명을 해치운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동료일 것이고, 서로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헌데 이 설중행이란 놈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는 사이라고 보기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갑판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속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던 소림의 각원선사(覺元禪師) 와 소림의 이대제자로 보이는 네 명의 승려들마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으로 흥미를 보이며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자식…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내 눈을 속이고 있는 거야?'

차라리 이놈이 모른 척 했다면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에 팔뚝만한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 들어 있다는 풍철한 마저도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또한 풍철한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이 배의 선장이 보여준 태도였다.

그는 과거 장강(長江)과 바다를 넘나들며 활동한 자로 물에서는 적수가 없다던 바로 해룡신(海龍神) 위일천(魏溢天)이었다. 젊었을 적 해적질을 한 관계로 흑경(黑鯨), 또는 해마(海魔)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스스로 운중보에 투신한 이후 십오 년이 지난 터였다.

그런 그가 수하 둘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음에도 그저 지켜만 볼 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 수하를 믿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저 자가 진짜 손님인지, 아닌지 판단을 못해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저런 자는 당장에 물 속에 처박아 물고기 밥이 되도록 만드는 게 그의 성격에 걸 맞는 태도였다.

'도대체 이번 운중보주의 회갑연에 뭔 일이 있는 거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는 또 왜 부른 거야? 거기다가 위세 등등한 저 관인들까지 오는 이유는 뭐야?'

어디에 묶이는 것을 본래부터 싫어하는 풍철한은 자꾸 짜증이 났다. 회갑연이란 게 뻔하지 않은가? 더구나 천하제일인이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하는 운중보주의 회갑연에 찾아올 손님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 아닌가 말이다.

이 갑판에 탄 인물들만 하더라도 이름 석자만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자들이다 보니, 결국 회갑연은 이들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의 잔치가 될게 뻔했다. 그런 자리에서 숨죽이며 주는 음식이나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며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헌데 셋째 반효를 움직여 자신을 직접 찾아오게 하고는 되도록 빨리 와달라는 것이다. 그것도 넌지시 형제들 모두 와주었으면 한다며. 사실 무림에서도 골치 거리요, 나타나면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는 그들 중원사괴를 부를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다 해도 오히려 말려야 정상이었다.

'빌어먹을… 가보면 알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알 수는 없었다. 슬그머니 설중행을 바라보다 다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자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생각을 멈췄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다급하고 위험한 장면이 들어왔다.

그 자는 아직 부교(浮橋) 위에 서 있었다. 더구나 자신을 막아선 선원들이 보라는 듯 이미 부교를 올라선 관헌 일행을 기다리는 듯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서당두라 불린 인물이 천천히 다가오자 그 자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서대인(徐大人)을 뵈오. 소관이 아무리 이 분들께 서대인 일행이라 설명해도 믿지를 않는군요. 서대인께서 말씀 좀 해 주시지요."

아주 태연히 말하는 그 자를 보며 선원들은 막무가내로 내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성질대로 이 자를 물에라도 처박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사를 받은 서당두란 인물은 정작 복잡한 기색을 띄웠다. 처음 볼 때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떠올렸다가 금세 의혹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잠시간의 실태를 깨달은 듯 평정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놀란 빛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능글맞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와는 전혀 딴 판이었다.

"자…자네가 미리 와 기다린 것인가?"

그는 침착 하려고 했지만 뭔가 불편한 듯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이미 그들의 일행임을 증명하는 말이어서 선원들은 그를 막고 있던 자세에서 길을 비키듯 좌우로 비켜섰다.

헌데 그때였다. 선두에 선 서당두가 멈추자 뒤를 따르던 일행 모두가 부교 위에서 정지되었고, 갑자기 부교가 출렁거리는가 싶더니 승교 밑이 뚫려지며 물보라가 일었다. 아니 물 속에서 무언가 튀어 오르며 물보라가 일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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