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독립기념관
'서시'의 잘못된 번역... 오해와 대립만 심화시켜
최근 재일교포학자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 일본인 문학가의 개인적 정서로 인해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바로 이부키의 번역에 있다"(<한겨레신문> 7월 14일자 '모어'라는 감옥)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세워진 윤동주 시비 위의 이부키 역 '서시'들 또한 계속해서 오해의 또 다른 실타래로 이어져 갈까봐 걱정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는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와 '보편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사랑'이라는 두 시각이 충돌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윤동주의 서시는 이미 기독교 신앙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에 대한 애환이라는 특수한 가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융합된 역설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도, 누락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원문이 왜곡됐는지의 여부인데, 심각한 오역이 일본에서 정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렇듯 윤동주의 시를 바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의 시 세계의 두 가지 체험과 가치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식민지 수난의 민족 일원으로서의 실존적인 고통 체험과 거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고 결단할 수 있게 뒷받침해주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다.
물론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그 폭을 확대시키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겠으나, 한 일본인 문인의 옹졸한 의도는 시인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적잖이 왜곡시키고, 교묘한 은폐의 의도로 얼룩진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고 말았다.
| | |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생애 흔적 | | | | 1942년 6월 3일,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작품 '쉽게 씌여진 시'를 씀 19942년 7월, 간도 용정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방문. 1942년 10월 1일, 교토로 옮겨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 1943년 7월, 일경에 의해 체포됨. 1945년 2월 16일, 의문의 주사를 맞던 중, 옥사함. 1946년 7월, <경향신문>에 유작 <쉽게 씌여진 시>가 발표. | | | | |
이번에 시비가 새롭게 세워진 곳은 시인의 도시샤 대학 유학시절 자취방이었던 다케다(武田) 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창작의 열정을 꽃피웠던 마지막 처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굴레가 씌워져 1943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알 수 없는 이유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함께 체포돼 역시 옥사한 시인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밝힌 바 있어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설도 있다.
그가 마지막 삶을 살았던 일본 교토의 한 변두리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가 또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잰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시비를 지켜보던 중, "윤동주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다"며 무심코 내뱉은 아내 미나꼬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윤동주는 어느새 교토지역의 관광자원으로 인식되고, 도시샤, 교토조형예술대학 등의 학교 홍보용 소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인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교수도 새로운 시비 건립 계획을 발표해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었다 기 보다는 무조건 시비만 세우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도구적 논리가 앞선 것 같다.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선생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에 반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오역들이 모두 고쳐져 새롭게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부키씨의 번역이 새 시비 위에 버젓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일본 기독교 출판국. 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나는 교토 변두리에 세워진 새로운 시비 앞에서, 60여 년 전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세워진 시비 위에 그의 마지막 유작 <쉽게 씌여진 시(詩)>가 새겨졌어야 한다는 깊은 아쉬움을 지금까지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쉽게 씌어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1942년 6월 3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