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정리하다가 10여년 된 책을 발견하다

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록 2006.08.19 19:43수정 2006.08.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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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을 같이하는 30대 초반의 새댁은 살림 사는 재미가 깨소금 맛인지 볼 때마다 생기가 넘쳐난다.


"장롱만 움직이면 이제 집안 정리 다 됐는데 오늘 그거 할 거예요."
"장롱? 아니 그 무거운 장롱을 혼자서 옮긴단 말이야?"
"그거 혼자 할 수 있어요. 지그재그로 움직이면 돼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구들을 들어내고 집안 대청소를 하는데 장롱만 움직이면 정리 끝이란다. 띠 벽지를 사와서 밋밋한 벽에 포인트를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페인트칠도 혼자서 다 해낸다. 나는 그 열정이 슬며시 부러워졌다.

"나도 그럴 때 있었는데...나도 30대 때는 집 확확 바꾸고 그랬어. 인제는 마음은 있어도 몸이 안 따라줘. 이게 늙는다는 거겠지?"

새댁의 기를 조금 얻어 와서 나도 집안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늦더위가 물러나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요맘때가 집안 대청소의 적기다. 오늘은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일을 해치우기로 마음먹고 작업에 들어갔다.

집을 치우다가 시작한 옛날 책 읽기

1997년 5월부터 '작아'랑 함께 했네요.
1997년 5월부터 '작아'랑 함께 했네요.이승숙
처음엔 별거 아닌 작은 일로 시작하지만 하다보면 일이 점점 커진다. 이 쪽을 치우다 보면 저 쪽도 마음에 걸려서 치우게 되고 그러다보면 집안은 마치 이사 들어온 집처럼 책이랑 가구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책들을 한 자리에 모으다가 그 중 한 권을 빼들고 읽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 십 년도 더 지난 오래된 책이었다. 두 번씩이나 이사하는 동안에 월간지나 주간지 같은 철 지난 책들을 많이 버렸는데도 안 버리고 챙겨왔던 책들이다.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신도시 아파트 상가에 있던 작은 서점은 참고서와 아동 도서들로 벽면이 다 채워져 있다시피 했다. 찾는 이들도 대부분 학생들이었고 간혹 가다가 어른들이 들르기도 했지만 그들도 대부분 월간지나 주간지를 사 가는데 그치곤 했다. 그래서 그 서점의 진열대엔 참고서와 월간지 그리고 잘 나가는 아동 문학서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느 날 지나는 길에 서점에 들른 나는 이것저것 주섬주섬 훑어보고 있었다. 그 때 내 눈에 뜨인 책이 한 권 있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다른 책들은 사람의 눈길을 붙잡기 위해서 다들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데 반해 그 책은 화장을 하나도 안 한 여인처럼 수수하고 소박했다.

'작아'는 1996년 6월에 태어났답니다. 제가 맨 처음 만난 1997년 5월의 '작아'입니다.
'작아'는 1996년 6월에 태어났답니다. 제가 맨 처음 만난 1997년 5월의 '작아'입니다.이승숙
겉표지 역시 담백했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 그림이 책 표지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었고 책머리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하 작아)란 책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니 그 참 희한한 말이네 생각하며 책을 빼들고 책장을 넘겨보았다. 책은 재생지로 만들어서 겉보기엔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다.


그러나 책을 손에 쥔 느낌은 오붓했고 수록되어 있는 글들도 다정스러웠다. 그 날 이후로 '작아'는 우리와 함께 했다. '작아'는 강산이 바뀐다는 십 년 세월을 달마다 조용히 우리를 찾아왔다.

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다가 책이 오면 아껴가며 봤던 시절도 있었다. 손이 잘 닿는 곳에 두고 가족 모두가 오며가며 들춰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소박하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게 되었다. '작아'에 빠져서 행복하게 몇 년을 지냈다.

세월이 흐르고 책도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알고 지내던 편집실 사람들이 '작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갔고 새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자 나는 그만 '작아'가 낯설어졌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한동안 '작아'는 내 사랑을 예전처럼 받지 못했다.

'먼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나는 '작아'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천천히 '작아' 곁으로 다가갔다. '작아'는 그 때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작아'와 친구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책장을 짜넣었습니다. 십 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한 '작아'를 가지런히 모아놓았습니다.
텔레비전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책장을 짜넣었습니다. 십 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한 '작아'를 가지런히 모아놓았습니다.이승숙
텔레비전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자그마한 책장을 짜 맞춰 보았다. 송판 몇 장을 벽돌로 괴어서 책꽂이를 만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작아'를 옮겨다 두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기다려 준 '작아'를 내 손이 가장 닿기 쉬운 곳에다 두었다.

오며가며 '작아'를 빼서본다. 십 년 전 것도 빼보고 일 년 전 것도 빼본다. 그 속엔 다정다감하고 인정스러웠던 내 젊은 날들이 녹아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연합'에서 매월 펴내는 책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줄여서 '작아'라고 부릅니다.

덧붙이는 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연합'에서 매월 펴내는 책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줄여서 '작아'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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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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