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 복싱 잘해요, 내 얼굴을 때려요"

때리고 가두고, '눈물'의 국제결혼... 인권단체, 대안찾기 부심

등록 2006.08.30 18:28수정 2006.08.3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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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외국인 노동자 쉼터. 이곳에는 가정 폭력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필리핀 여성 7명이 살고 있다.
서울의 한 외국인 노동자 쉼터. 이곳에는 가정 폭력을 피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필리핀 여성 7명이 살고 있다.오마이뉴스 이민정

"우리 남편, 복싱(boxing·권투) 잘 해요. 진짜 빨라요. 내 얼굴이 메탈(metal·철)인 줄 알았나봐요. 막 때렸어요.(웃음)"

6일전 집을 나온 필리핀 여성 안나(22·가명)씨는 한국인 남편을 '권투 선수'에 비유했다. 30일 서울의 한 외국인 노동자 쉼터에서 만난 그녀는 비슷한 처지의 필리핀 여성들과 함께 지낸 덕분인지 얼굴 표정이 밝았다.

하지만 그가 털어놓은 한국 생활 1년은 지옥 같았다. 그는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석달 된 아이를 안고 집을 뛰쳐나와 쉼터로 들어왔다.

첫눈에 반했다더니, 한 달 뒤에 '폭력남편'

안나는 필리핀에 관광온 남편을 따라 지난해 2월 한국에 왔다. "첫눈에 반했다"는 남편은 한 달 뒤 '폭력 남편'으로 변했다.

술에 취한 남편은 밤늦게 귀가해 안나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도 구타했고, 머리채를 잡고 옥상으로 올라가 "같이 떨어져 죽자"고 주사를 부렸다. 남편이 달라질까 임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참다못해 필리핀으로 돌아갔다가 남편이 무릎꿇고 빌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계속됐고, 경찰이 여러 차례 집으로 출동했지만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아이를 안고 집을 나왔다.


올해 19살인 아요(가명) 또한 남편의 폭력 때문에 쉼터로 들어왔다.

한국어라고는 "저 한국말 못해요" 밖에 하지 못하는 그는 "남편이 결혼 2개월만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요는 남편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단다. 53살인 남편은 아요와 재혼했다.


인터넷 화상 채팅을 통해 아내를 찾던 남편은 '신부 후보'로 나온 아요의 친구 소개로 아요를 알게 됐다. 그는 "남편이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많은 돈을 쓴 것으로 안다"며 "그 때문인지 남편은 내가 필리핀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아요는 하루 생활비 6천원으로 생활했다. 하루 용돈으로 적은 돈이지만, 그 중 2천원을 매일 저금할 정도로 생활비는 들지 않았다. 남편이 출근하면서 문을 잠그고 나가 집밖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권에는 마음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감금 생활'이었던 셈. 남편은 "한국어 공부하려면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라"고 강요했다.

아내 가두고 출근하는 '할아버지' 남편

안나와 아요가 머물고 있는 쉼터에는 총 7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방 2개짜리 연립주택에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의 사망·발병 등의 원인으로 갈 곳이 없는 여성들도 있지만, 알코올 중독인 남편의 폭력 피해자라는 점은 이들의 공통 분모였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두 아이를 친척집에 맡기고 쉼터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은 "한 달에 두 번 만나는 아이들이 보고 돌아올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 남성들이 다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는 설득에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더 이상 남편을 믿지 않는다"고 나즈막하게 읊조렸다.

김민정 이주여성인권연대 정책국장은 "외국 여성을 상대로 한 결혼 중개업은 음주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 혼인 생활을 유지할 능력이 떨어지는 한국 남성들이 쉽게 결혼할 수 있는 구조"라며 "특히 음주로 인한 이혼 경력이 있는 남성들로 인한 이주여성의 신체적 위해와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이주 여성들은 폭력 피해와 같은 상황에 노출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며 "이주노동자 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폭력 피해자인 여성들을 위한 쉼터 등이 생기고 있지만, 전국에 10여개밖에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통계청이 지난 3월 발표한 '2005년 혼인·이혼 통계결과'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 남성과 결혼은 외국 여성은 총 15만9942명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990년 4700여건이던 국제 결혼은 2005년 4만3000건으로 10배 정도 늘어났다.

1990년만 해도 외국인 아내(619건)보다 외국인 남편(4091건)이 월등히 많았지만, 1995년부터 외국인 아내(1만365건)가 외국인 남편(3129건)을 추월했다. 즉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한국 남성의 수가 급증했다는 뜻이다.

'불법체류자 될까봐'... 피해 신고도 못해

보건복지부가 2005년 여성 결혼이민자 가족 9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국제결혼 이주여성 실태조사 및 보건·복지 지원 정책방안'에 따르면, 여성 결혼이민자 중 1년간 '언어폭력을 경험했다'는 이가 전체의 31%로 가장 많았고, '신체적 폭력'과 '성행위 강요' 등이 각각 14%에 달했다. '변태적 성행위 강요'도 9.5%로 나타났다.

여성 결혼이민자들이 폭력 피해자임에도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전체의 10% 정도였다.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20%), '신고하는 방법을 몰라서'(14%), '신고해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것 같아서'(13%), 체류 자격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10%) 때문 등이었다.

임순영 한국인권재단 연구원은 "여성 결혼이민자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한 정보도 없을 뿐더러 '국적 취득 전(국내 거주기간 2년) 이혼을 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관련 규정 때문에 여성들이 더욱 침묵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임 연구원은 "관련법이 개정돼 2년 전이라도 한국인 배우자의 귀책 사유로 이혼을 한 경우 국적 취득이 가능하지만, 혼인 파탄에 대한 책임을 입증해야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어 한국말이 서툰 이주 여성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인권재단은 31일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한국살이'를 주제로 토론회를 연다. 이 자리에는 국제결혼한 부부가 패널로 참석해 이주 여성의 적응 과정을 발표하고, 고현웅 국제이주기구 한국사무소 소장과 김민정 이주여성인권연대 정책국장, 소라미 변호사 등이 제도적 문제점과 대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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