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님요, 저거 가져다가 불 땠으마 좋겠구메"

찬바람만 불면 땔감 나무 들일 걱정에 꽁꽁(?) 앓는 촌 아지매

등록 2006.08.31 09:14수정 2006.08.31 17:1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습니다. 마당가를 낮게 선회하는 잠자리들이 한두 마리씩 보입니다. 여름은 끝물 과실처럼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다가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질 것 같습니다. 이제 풀벌레 소리가 한밤의 시심을 울릴 가을이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나기 준비를 해야 합니다. 겨울나기 준비로는 뭐니 뭐니 해도 땔감 장만이 최우선이겠지요.

지금은 겨울 땔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전에는 겨울 한 철 나기가 큰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방마다 군불을 때야 했으니 땔감 장만하는 일이 겨울나기의 가장 큰 숙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나락 두지와 땔감 둥치, 그 집 살림의 바로미터

예전에는 집 뒤곁에 이 보다 훨씬 더 큰 소깝 삐까리(땔감 둥치)가 집집마다 있었지요.
예전에는 집 뒤곁에 이 보다 훨씬 더 큰 소깝 삐까리(땔감 둥치)가 집집마다 있었지요.이승숙
가을걷이도 다 하고 지붕에 이엉도 새로 갈고 나면 그 때부터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닙니다. 장골들은 나뭇짐을 둥실하게 한 짝씩 해 와서 집 뒤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당엔 나락을 넣어두는 나락두지가 새로 생겼고 집 뒤 안엔 땔감 둥치가 산만큼 솟아 있었습니다.

나락 두지와 땔감 둥치는 그 집의 살림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했습니다. 살림이 없는 집은 나락두지도 작았고 땔감 둥치도 변변찮았지만 살림이 많은 집은 나락두지도 둥실하게 컸고 집 뒤 안엔 나무 둥치가 두세 개씩이나 있었습니다.


예전에 우리 동네 아지매들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들이를 갔답니다. 윗대 조상들을 모신 산소를 참배하고 재실에도 들러서 구경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재실 들어서는 길목에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서있는데 가을이라 그런지 깔비(소나무 낙엽)가 푹신하게 깔려 있더랍니다. 그거 보고 한 아지매가 한다는 말이 "행님요, 저거 끌어다가 군불 땠으마 좋겠구메"라고 했답니다.

천상 농사꾼인 그들은 깔비를 보면 군불 땔 생각을 하고 또 모처럼만에 시간 내서 나들이 가서도 다른 지방에서는 어떻게 농사짓는지 그런 것만 눈에 보이나 봅니다.


나무 잡아먹는 하마, 화목 겸용 보일러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보면 빼서 불 때기가 아까웠지요.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보면 빼서 불 때기가 아까웠지요.이승숙
우리 집은 기름과 나무를 같이 때는 겸용 보일러로 난방을 합니다. 화목 겸용 보일러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니까 기름값을 아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찌 보면 좋은 것도 같은지만 화목 겸용 보일러는 나무를 잡아먹는 하마입니다.

구들방은 구들돌을 달궈서 방을 데웁니다. 돌을 달구기만 하면 그 돌이 식을 때까지 방이 따뜻합니다. 하지만 기름보일러는 물을 데워서 난방을 합니다. 방바닥에 깔아놓은 관을 따라서 뜨거운 물이 돌고 돌면서 방을 데우는데 물이 식으면 방도 식어 버립니다. 방이 식지 않으려면 물이 식지 않도록 하루 종일 불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나무가 참 많이 들어갑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으로 이사 온 그 해 겨울(2000년), 저는 내내 마음에 뭔가 모를 조바심이 찼어요. 군불을 안 때도, 기름만으로도 얼마든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데도 저는 왠지 모르게 자꾸만 조바심이 나는 거였어요. 집 뒤 안에 장작이 그득해야 마음이 놓일 거 같은데 장작을 장만하지 못해서 그랬던 겁니다.

베어져 있는 나무만 보면 '욕심'이 난다

길 넓힌다고 뽑아버린 나무입니다. 나무가 쓰러져 있어도 가져갈 길이 까마득해서 그냥 묵혀 버리는 경우도 많답니다.
길 넓힌다고 뽑아버린 나무입니다. 나무가 쓰러져 있어도 가져갈 길이 까마득해서 그냥 묵혀 버리는 경우도 많답니다.이승숙
어렸을 적, 그 때 우리 집 뒤꼍에는 산만큼 큰 나무 둥치가 두 개나 있었어요. 도끼로 나무를 쪼개서 차곡차곡 쌓아둔 장작더미도 처마 밑을 따라 길게 나 있었지요.

시골로 이사 오고 보니 어릴 때 보았던 그 땔감 둥치가 우리 집에 없어서 그렇게 조바심이 났던 것 같습니다. 땔감을 장만하지 않고는 겨울나기 준비가 안 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지요. 전화만 하면 기름차가 와서 기름을 배달해주는데도 왜 그런지 자꾸 마음이 차지 않았어요.

그 때 우리 집에는 집수리하다가 나온 땔감 나무들이 좀 있었는데도 나는 그 나무로는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땔감을 둥치로 쌓아놓아야 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내심 불안했던 거지요. 그래서 이웃 분에게 부탁을 해서 간벌한 참나무를 한 차 가득 사들이고서야 나무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겨울나기가 어른이 되고 그리고 땔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호시절에도 내내 저를 잡고 있었던 겁니다.

눈이 많이 내린 날, 눈 속에 조용히 서있는 우리 집입니다.
눈이 많이 내린 날, 눈 속에 조용히 서있는 우리 집입니다.이승숙
그 옛날 동네 아지매들이 깔비를 보고 욕심냈던 것처럼 저도 어디 가다가 베어져 있는 나무만 보면 은근히 욕심을 냅니다.

'이야, 저거 가져다가 때면 잘 타겠네. 한동안은 나무 걱정 안 하겠네.'

다시 계절이 바뀌고, 그리고 곧 찬바람이 불겠죠. 땔감 걱정 안 해도 괜찮은데도 나무만 보면 저는 또 욕심을 내겠지요.

'저 나무 저거 가져다가 때면 며칠은 뜨뜻하게 지내겠네. 저 나무 저거 가져올 길 없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