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독도서관에서 보낸 여름 한철

등록 2006.08.31 19:01수정 2006.08.31 19:01
0
원고료로 응원
무던히도 더웠던 여름 동안 새로 고친 정독도서관에서 행복한 한철을 보냈다. 이유는 중고교 시절, 대학교 시절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읽기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국동 전철역에서 내려 북촌길로 10분 정도 걸어 수령 210년 된 회화나무가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대나무숲과 향나무가 있는 비탈진 도로로 조금 오르면 정독도서관(서울시가 경기고등학교를 인수하여 1977년 1월 4일 개관) 정문이다.

a 도서관 정원에서 본 인왕산

도서관 정원에서 본 인왕산 ⓒ 진병일


정문에서 바라보면 도서관 건물 뒤로 인왕상이 보인다. 잘 조성된 정원 길을 따라 나는 항상 도서관 본관 건물 2층이 인문사회과학실로 들어갔다. 냉방시설이 잘 된 도서관 안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읽고 싶은 책을 5권 분량 정도 골라 창가에 자리를 정하고 앉는다.


a 도서실 안 좌석의 창문

도서실 안 좌석의 창문 ⓒ 진병일


2시간 정도 책을 읽다 채광이 잘 된 창밖을 찾다보며 휴식을 취한 후 책을 다시 읽곤 했다.

a 도서관 책 진열대

도서관 책 진열대 ⓒ 진병일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다 지루하면 날씨가 후텁지근해도 밖으로 나온다. 그늘진 등나무 덩굴 아래의 나무의자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본다. 바쁜 일상사의 시름을 잊고 한 여름 매미가 토해 놓는 울음을 음미해 본다.

a 등나무숲

등나무숲 ⓒ 진병일


도서관 본관 건물 우측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변에 물레방아와 원두막이 있어 농촌에서 자란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해준다.

a 물레방아

물레방아 ⓒ 진병일


원두막을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은“나는 수없이 도서관에 왔는데 저 원두막에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하고 투덜거린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이 말한 건 철없는 젊은이들이 누워있던 광경에 시샘이 나서일 게다.

a 원두막

원두막 ⓒ 진병일


도서관 본관 좌측 앞에 종친부(宗親府-1969년 서울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됨)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의 친족(親族) 관계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하나로, 종실제군(宗室諸君)의 품계와 벼슬 인사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a 종친부 건물

종친부 건물 ⓒ 진병일


종친부는 1433년(세종 15) 고려의 제군부(諸君府)를 고친 이름으로, 1864년(고종 1)종부시(宗簿寺)를 합하고 94년(고종 31) 종정부(宗正府)로 개편하였다. 원래 이 건물은 국군통합서울병원 구내인 소격동 165번지에 있었으나 1981년 8월에 옮겨왔다고 한다. 종친부 건물은 큰 건물인 중당(中堂)과 그 오른쪽에 딸린 날개 집인 익사(翼舍)가 있다. 왼쪽에도 오른쪽과 같은 날개 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겸재인왕제색도비이다. 이 비는 1992년 6월 문화부(현 문화광관부)가 영조 27년(1751년) 겸제 정선이 동쪽에서 본 서울 인왕산을 그린 그림인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를 그려 넣어 세운 것.


a 겸제인왕제색도비

겸제인왕제색도비 ⓒ 진병일


내가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은 <오국사기>(전3권 이덕일 지음),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조용헌 지음), <다시 쓰는 택리지>(전5권 신정일 지음),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 <우리 역사를 움직인 20인의 재상> 등 50여 권이다. 그중 한두 권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20년째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토 문화답사를 해온 문화사학자 신정일(52·황토현문화연구소장)씨가 쓴 우리 산하의 인문지리서 <다시 쓰는 택리지> 전5권을 읽으면서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전 국토를 누비며 쓴 흔적을 가만히 앉아서 본다는 게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우리나라 온누리 산하와 풍속을 이 여름에 모두 살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었다.

가슴에 감동으로 남았던 문장이 많았지만 "누군들 가슴 안에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 하나 가지지 않고, 누군들 흘러서 넘치는 강(江) 하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만, 저마다 스스로의 가슴을 적시고 지나가는 강이 우주와 영원을 흐르는 강..." <다시 쓰는 택리지 4권> '강에 대한 그리움'에 이르러서 몇 시간 책장을 넘기지 않고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다.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는 500년 한국의 명문가 15곳의 역사와 정신,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조용헌 교수가 전국의 명문가를 직접 돌며 자세하게 채록하여 놓았다.

각 명문가의 역사와 자녀 교육법, 치부법과 더불어 명문가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풍수까지 한국 명문가, 그들만의 원칙을 살펴보고 있다. 멋과 풍류를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조상들의 지조와 멋을 보여주고 있어 좋았다.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의 등장하는 <신지비사>는 문헌으로서는 아주 오래 된 유전(遺傳)이요 신앙상으로도 중대한 힘을 가졌던 도참이었다. 마치 중국의 <위서(緯書)>와 같이 절대적인 예언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초 한양 천도를 할 때에도 조정에서 <신지비사>를 서운관(書雲觀)에 고이 간직하였다.

세조 이후 <신지비사>의 흩어진 산적(散籍)을 수집하기 위해 고심하였는데, 특히 <고조선비사> 비롯하여 <대변설>, <조대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동천록>, <통천록통천록>, <도증기> 등 여러 고서를 현상금을 걸고 수집하였다.

예종 때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법을 엄히 하여 이 고서들을 “감춘 자는 처단한다”는 영을 내렸다.(세조, 예종 성종의 삼조의 실록 참조)

그 중에서도 <조대기> <삼성밀기> 같은 책은 <신지비사>와 같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니 없어진 고서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문전>에서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일제강점기 나라가 국권을 잃었을 때도 선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라진 역사책에 대한 한탄을 하고 있다.

최근 필자도 개인적으로 조선상고사 자료를 찾고 있는데 자료가 너무 빈약해 개탄스러움을 한두 번 느낀 게 아니다.

내 자신도 여름의 시원한 바닷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면서 여름휴가를 보내고도 싶었다. 올해 조선상고사 자료 때문에 정독도서관에 몇 달을 드나들었다. 내가 원한 조선상고사 자료는 거의 열람할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 자료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 조선상고사 자료뿐이겠는가.

a 연꽃

연꽃 ⓒ 진병일


도서관 건물은 잘 보수하여 놓았지만 읽고 싶은 책이 소장되어 있지 않아 열람을 못한 책도 많았다. 아주 나쁜 책이 아니라면 당연히 도서관에 책이 진열되는 날은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a 무궁화

무궁화 ⓒ 진병일


도서관의 연못에 핀 연꽃이며 무궁화를 보면서 이제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어느 해 여름보다 나는 정독도서관 뒤편으로 펼쳐져 있는 인왕산의 정기를 가까이 했다. 그리고 내 부족한 내공을 정독도서관에서 연마하면서 한철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덧붙이는 글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