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머리 세 살짜리 영주는 내 친구?

우리 동네에서 '썰렁한 장난'을 받아주는 유일한 친구

등록 2006.09.02 13:33수정 2006.09.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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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아자씨!"
"아녀, 나 인저 스님여, 이거 봐 빡빡 밀었잖어."


일 년에 한 번씩, 여름철마다 빡빡 밀어 버리는 내 머리통을 영주 녀석의 코앞에 들이밀자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리고는 이내 히 웃습니다.

"스님, 그래 봐봐."
"헤, 스~님."

a 우리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빡빡머리 세살짜리 영주

우리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빡빡머리 세살짜리 영주 ⓒ 송성영

올해 세 살, 영주는 우리 동네에서 나이가 제일 어립니다.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든 나처럼 그냥 시원하게 빡빡 밀고 다니는 사람이든 빡빡머리만 보면 스님, 스님 그럽니다. 물론 스님에게도 스님이라고 하지요.

하긴 부처님 가라사대 누구나 다 부처라 했는데 그냥 빡빡머리든 훌렁 벗겨진 대머리든, '스님'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웃기는 건 영주 녀석 자신도 빡빡머리면서 자신은 스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에 사념까지 없어 보이니 이만하면 한소식 했다는 어지간한 스님 뺨 칠만한 경지가 아닙니까? 이렇게 나는 사념이니 분별심이니 높고 낮은 경지를 따지지만 세 살짜리 영주는 이런저런 잔머리 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히야, 영주 너 오늘도 장화 신구 왔구나, 나는 사십이 다 돼서 내 장화를 가질 수 있었는디, 넌 참 좋겠다."

장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주는 자신이 신고 있는 파란색 장화를 쓰윽 쳐다보며 헤벌쭉 웃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허심탄회'하게 속 보이는 장난을 받아줄 사람은 영주뿐입니다. 시골마을 동네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이 우리 동네 사람들은 노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보다 나이가 한 배 반쯤 많은 노인들에게 그런 속보이는 장난을 걸었다가는 아마 귀싸대기 얻어맞기 십상일 것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요? 우리 집 아이들 역시 한때 영주와 같이 잘 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장난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녀석들과 노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녀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빠와 노는 것이 더 이상 재미가 없나봅니다. 수준이 맞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가 거는 장난이 녀석들에게 어느 날부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장난으로 전락해 돼버렸습니다.

"인효야, 너 누구냐?"
"에이 썰렁해."
"너, 본래는 다람쥐였지?"
"말도 안 돼."
"토끼였나?"
"그만해, 썰렁하니께."

열두 살, 우리 집 큰 녀석 인효. 제 수준에 맞지 않다고 내 '유치한 장난'을 더 이상 받아 주지 않습니다.

"인상아, 니 손가락하구 내 손가락하고 바꿀래? 내가 다섯 손가락 다 줄게 너는 한 개만 줘."
"어떻게 바꿔, 손가락을 바꿀 수 있어?"

별 생각 없이 여전히 혼자서도 잘 노는 작은 녀석 인상이는 열 한 살이지만 그나마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녀석도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썰렁해지기 일쑵니다.

"바꿀 수 있지, 자 잘 봐봐 니 손가락 하나 줘봐, 얍!, 바꿨지?"
"에이, 썰렁해."
"썰렁하기는 임마, 니가 더 썰렁하다, 인저 말도 안통하구."

이제 녀석들의 머리통이 굵어져서 말이 잘 안 통합니다. 녀석들은 아빠가 말도 안 되는 장난을 건다고 여깁니다. 예전에는 세 살짜리 영주처럼 자신들도 재미있어 하던 장난이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었나 봅니다. 이제 우리 동네에서 내 '썰렁한 장난'을 가장 잘 받아주는 사람은 영주뿐인 것입니다.

영주는 자신이 감당하기에 턱없이 높아 보이는 마루 아래로, 뜰팡에서 마당으로 훌쩍 훌쩍 잘도 뛰어 내립니다. 무념무상에 들어 공중부양 하는, 거의 '무협지' 수준입니다. 생각이 많은 어른들 보기에 위태롭기 그지없는 '무협놀이'지만 코방아 쪄 크게 다치는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울퉁불퉁한 마당을 생각 없이 뛰어다니다가 내게 손짓합니다. 친구처럼 부릅니다.

"이루와 봐, 아자씨 이루와 봐요."

녀석은 나를 닭장으로 이끌고 갑니다. 닭들을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은데 혼자 가기에는 좀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벼슬 세운 수탉의 눈빛을 영주의 눈높이로 바라보면 엄청 매섭게 생겼거든요.

"너 닭을 손으로 잡을 수 있어?"
"아니."
"나는 꼼짝 못하게 잡을 수 있는디."

녀석은 내가 대단하다는 듯 올려다봅니다.

아내에게 우리 동네에서 영주가 유일한 내 친구라고 말하면 눈살을 찌푸립니다. 공연히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척,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내 역시 통하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냥 척, 하면 척하는 대로 받아 주면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세 살짜리 영주는 다 받아 줍니다.

"영주야 너 저기 가서 인상아 불러봐."
"인상아!"
"인상아 놀자 그래봐."
"인상아 놀자!"

"영주야 그러면 안 돼지."
이쯤 되면 영주 엄마가 나섭니다.

"인상이 형아 라고 해야지."
"인상이 형아."

인상이와 함께 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디신 푸른 포도 알을 두 눈이 감길 정도 신물 나게 깨물다가 아릿한 생감자를 입에 대기도 합니다. 아작아작 깨물어 먹다가 부엌 앞에서 팔자 늘어지게 졸고 있는 야옹이에게 다가갑니다.

a 영주의 손등을 할킨 야옹이, 다시 찾아가 '너 몇살?' 묻곤 합니다.

영주의 손등을 할킨 야옹이, 다시 찾아가 '너 몇살?' 묻곤 합니다. ⓒ 송성영

먹다만 생감자를 내밀자 고양이가 귀찮아하며 순간 영주의 손등을 할퀴고 말았습니다. 영주의 손등에 피가 맺혔습니다. 울음보 터지기 일보직전, 입을 삐쭉삐쭉 거리며 시동을 겁니다. 나는 나뭇가지에 긁힌 정강이 부분의 굵은 상처를 영주에게 보여줍니다.

"이거 봐라, 나는 너보다 더 큰 상처 났지만 안 울었어."

영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삐쭉거리던 입이 금세 헤 벌어집니다.

영주하고 놀다 보면 생각이 없어집니다. 잡념이 없어집니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온종일 밭을 매는 일 같습니다. 뒷짐 지고 산행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땀 저린 몸뚱이를 기분 좋게 씻어 낼 때처럼, 나무에게 실없이 대화를 건 낼 때처럼, 영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 히죽히죽 웃게 됩니다.

영주는 엄마 따라 종종 우리 집에 마실 옵니다. 오늘은 책을 읽고 있는 우리 집 아이들 틈에 끼어들어 뭐라 참견을 합니다.

a 우리집 아이들, 인효 인상이에게 바싹 다가가 뭔가 참견하는 영주

우리집 아이들, 인효 인상이에게 바싹 다가가 뭔가 참견하는 영주 ⓒ 송성영

영주는 조만간 형들처럼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많은 지식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장난을 걸면 잘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주는 여전히 세 살입니다. 벽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에게도 말을 걸줄 아는 세 살짜리 아이입니다
.
"파리야 미끄러져, 너 몇 살? 나 세 살."
손등에 핏물이 맺힐 정도로 호되게 당했는데도 야옹이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들고 겁 없이 다가갑니다.

"너 몇 살?"
야옹이는 귀찮은 듯 고개를 외로 돌립니다. 이번에는 내가 영주에게 묻습니다.

"나는 시방 마흔 일곱 살 먹었는디, 너는 몇 살여?"
그러면 녀석은 곧바로 손가락 세 개를 어렵사리 펼쳐들고 헤 웃으며 입을 엽니다.
"나 세 살."

내가 약간 맛이 간 인간처럼 보인다고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잘 안됩니다. 소풍 나온 아이처럼 노는 일에 미칠 정도로 푹 빠질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영주의 친구가 될 만큼 곱게 미칠 수가 없습니다. 영주가 놀고 싶은 만큼 함께 놀지 못합니다. 영주는 내가 놀자면 끝까지 놀아줍니다. 엄마 손잡고 집에 갈 때 까지 놀아주지만 나는 금세 흥미를 잃기 마련입니다.

영주가 내 손을 이끌고 이것저것 물어오기 시작하면 귀찮아 등 돌리기 일쑵니다. 나는 재미없는 세상살이에, 골머리 아프도록 잔머리 굴려야 할 일들이 마흔 일곱, 나이만큼이나 많은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생태전문 격월간지 <자연과 생태 econature.co.kr> (9,10월호)에 보낸 원고 입니다.

덧붙이는 글 생태전문 격월간지 <자연과 생태 econature.co.kr> (9,10월호)에 보낸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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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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