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안 죽었으니 어서 죽으란 말인가요?

'미망인'이란 말에 남은 '순장(殉葬)의 추억'

등록 2006.09.03 16:49수정 2006.09.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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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명시된 헌법 1조가 이의 없이 통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이 어째서 아직도 순장의 풍습(?)을 못 잊을까요.

뭐라! 순장이라고? 절대권력자가 죽으면 아끼던 가축은 물론 신하와 처첩까지 목숨이 끊이지 않은 채로 같이 묻고, 여염에서도 남편이 죽으면 멀쩡한 부인까지 무덤에 묻히게 했던 그 끔찍한 순장? 그 고대국가의 습속을 21세기의 대한민국이 못 잊는다고?


언어에 살아 남은 '순장의 추억'

분명 그렇습니다. 이 사회는 은근하지만 줄기차게 순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남자는 제외시키고 여자에게만 순장을 강요합니다. '미망인'이라는 야만적 용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중국 진시황은 수천 명을 순장시키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대안을 생각해냈지요. 사후에 말과 병사를 순장하는 대신 수천 개의 실물크기 흙 인형을 만들어 죽은 황제와 같이 묻히게 한 이른바 진시황의 병마용이 그것입니다.

병마용의 흙 인형들이 순장 습속의 연장선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순장의 추억' 아니 '살인의 추억'을 흙 인형으로 대신한 진시황의 아이디어에는 감독상, 시나리오상, 남우주연상, 소품상 등을 있는 대로 다 몰아주고 싶습니다.

한반도에서 순장의 끔찍한 악습 폐지가 확인되는 것은 6세기 무렵(신라 지증왕)이니 호랑이가 담배를 끊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입니다. 시대를 더 내려와 갑오개혁(1894) 때는 과부의 재가를 공식으로 인정했지요. 죽도록 정절을 잘 지키면 열녀문을 세워주던 나라에서 말이지요.


순장을 추억하는 듯한 아찔한 용어 '미망인'

선생의 미망인이며 서화가인 ***(82) 여사가 직접 붓을 잡아 완성한 이 작품은~ -<연합뉴스> 2006년 9월 3일자


유족회는 2차 세계대전 전몰자의 미망인과 직계 가족이 가입한 단체로,~ - <중앙일보> 2006년 8월 15일자

안익태 선생의 미망인 *** 여사를 만나 젊은 시절 그들의~
- <뉴스엔> 2006년 8월 4일자

미망인에게는 45만원 가량의 산재보험료가 매달 지급될~
- <뉴시스> 2006년 7월 21일자

미망인이란 용어 사용은 흔하디흔해 굳이 찾으려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방송에서도 미망인이란 말은 아무 거리낌 없이 쓰입니다. 심지어 미망인이라 부르는 것을 상대에 대해 예를 갖춰주는 경칭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필자는 연전에 어느 공식 모임에 갔다가 사회자가 주요 참석 인사 중 한 사람을 "누구의 미망인 아무개"라 소개하는 것을 듣고 즉시 정중하게 항의하여 "누구의 부인"이라고 다시 소개하도록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의 부인'으로 소개된 당사자께 사전 양해를 얻고서 항의한 일이었지요.

'살아있는 사람'은 남녀불문 모두 미망인

미망인(未亡人)이 대체 뭡니까. 아니 미(未), 잃을 망(亡), 사람 인(人) 세 글자가 모여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란 뜻이 된 것 아닙니까. 단어의 속내를 따져보면 '남편을 먼저 보내놓고 아직도 따라 죽지 않은 부인'이란 아주 기막힌 말이 됩니다.

물론 언어는 사용자(언어 대중)들의 사회 습속에 따라 글자가 원래 가진 의미 그대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기는 합니다. '산동네'가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하지 않고 '가난한 동네'를 의미하게 된 것 등이 그 예이지요.

그렇게 볼 때 미망인도 '혼자된 여자'를 뜻하는 말인 것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낳듯 호칭은 격을 낳습니다. 간호원은 간호사로, 보험아줌마는 생활설계사로 호칭이 바뀐 지 오랩니다. 환경미화원이라 해야지 청소부라 말하면 적절치 못한 호칭으로 취급되는 시대입니다.

의학이 매우 발달해서 평균 수명을 곱빼기로 늘려 놓는다 해도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므로 단어를 원래 뜻대로 쓰면 우리는 모두 미망인입니다.

이제 미망인이란 끔찍한 용어를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망인'이 아니라 '부인'입니다. 남편이 죽었어도 '부인'입니다. 재혼을 했다면 또 다른 사람의 '부인'일 뿐입니다. 왜 여태 안 죽었느냐고 따지는 격인 '미망인'이라는 야만적인 용어를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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