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보면 빠져든다... 내가 바로 범인?

[서평] 도서추리와 밀실트릭... 기시 유스케의 <푸른 불꽃>

등록 2006.09.05 09:26수정 2006.09.0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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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푸른불꽃>

<푸른불꽃> ⓒ 창해

추리 소설의 여러 장르 중에 '도서 추리'라는 것이 있다. '도서'라는 단어는 도치서술(倒置敍述)의 줄인 말이다. 글자 그대로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서술방식을 뒤집어서 전개하는 형태의 추리소설이다.

여기서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란 수수께끼 풀이형의 고전 추리소설로 한정한다. 도서추리소설과 일반추리소설을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나타난다. 그 차이점은 모두 일반추리소설의 전개방식을 뒤집음으로써 발생하는데, 이런 점들을 도서추리소설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작품의 주인공은 탐정이나 관찰자가 아닌 범인이다.
②작품의 흐름은 범인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③범인이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 그리고 이후에 형사와 공방전을 벌이는 모습이 기술된다.
④밀실이나 초자연 같은 불가능한 상황의 설정을 배제한다.
⑤범인은 완전범죄를 노리고 철벽같은 알리바이를 만들지만, 형사의 끈질긴 추적으로 결국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⑥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의 입장이 아니라 형사에게 쫓기는 범인의 내면을 묘사한다.


요약하자면,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범죄가 발견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한다. 그리고 탐정 또는 주위의 관찰자를 주인공으로 범인을 추적해나간다. 반면에 도서추리소설은 범인이 범죄를 구상하는 단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범죄의 구상과 실행, 추적하는 형사와의 대결까지 각 장면마다 범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내가 범인이 된다... 도서추리의 매력

이런 도서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크로프츠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리처드 힐의 <백모살인사건>,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좀더 현대로 와서는 로렌스 샌더스의 <제1의 대죄>도 도서추리의 명작으로 볼 수 있다.

몇 가지 세부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들은 모두 위의 특징을 담고있다. 이유 없는 연쇄살인범을 다룬 작품인 <제1의 대죄>를 제외하면, 다른 세 작품의 범인들은 모두 친인척을 범행대상으로 삼는다는 것도 재미있는 공통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범인의 범행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다는 점이다. <크로이든발 12시 30분>에서는 범인이 독약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고, <백모살인사건>에서는 독을 가진 식물과 독약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펼쳐 놓는다.

하지만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독자가 범인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내면을 따라가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리고 <제1의 대죄>를 제외한 다른 세 작품에서 범행의 수단으로 약물과 독약을 사용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일본작가 기시 유스케의 <푸른 불꽃>도 이런 도서추리의 여러 특징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기시 유스케는 이전에 출간된 <검은 집>, <천사의 속삭임>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검은 집>에서 광기어린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그리고 <천사의 속삭임>에서 신비주의와 생물학이 결합된 미스터리를 선보였다. 그리고 5번째 작품인 <푸른 불꽃>에서는 공포와 서스펜스를 배제한 채, 고전추리소설의 한 영역인 도서추리를 현대에 맞게 만들어냈다.

작품의 주인공인 구시모리 슈이치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세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던 가정은 어느날 그 집에 찾아온 한 불청객으로 인해서 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슈이치는 고등학생으로서는, 아니 일반인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든 방법으로 가정의 행복을 되찾으려고 한다.

이 작품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심리묘사에 있다. 범행을 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범행 중의 망설임, 이후의 회한까지의 과정을 빼어난 심리묘사를 통해서 이끌어 가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분노하고 머뭇거리고 좌절하고 두려움에 떠는 주인공에게 쉽게 감정이 이입된다. 작품의 전개속도가 빠르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추리의 현대판 <푸른 불꽃>... 심리묘사 탁월

현대에 와서는 도서추리소설을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현대의 추리소설은 법의학과 이상심리, 테크노 스릴러가 판을 치고 있는 추세다. 그런 흐름과 도서추리는 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면으로는 작품의 매 장면마다 범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 까다로워서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도서추리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 불꽃>은 분명 반가운 작품이다.

도서추리의 재미는 어떤 점일까.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어떤 트릭을 사용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도서추리의 재미란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범인의 내면을 읽어가는 점, 범인과 형사가 맞서서 교묘하게 벌이는 심리전을 바라보는 재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범인이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완전범죄를 형사가 어떻게 무너뜨리느냐를 추적하는 재미이다.

작품의 흐름을 범인의 입장에서 서술해서인지,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범인의 입장을 자꾸 동정하게 된다. <푸른 불꽃>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일본판 <죄와 벌>'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영원한 학생' 라스꼴리니꼬프의 실존적 고민과 구시모리 슈이치의 내면을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죄와 벌>의 전개와 유사하게 흘러가는 <푸른 불꽃>의 구성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기시 유스케의 작품들은 독특하고 다채롭다. 그의 전작들에서 느꼈던 공포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이 작품은 약간 의외일수도 있겠다. 어쩌면 기시 유스케는 <검은 집>과 <천사의 속삭임>에서 보여주었던 호러의 요소를 이제는 작품에서 없애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시 유스케는 6번째 작품인 <유리 망치>에서 고전추리소설의 또 다른 난제인 밀실에 도전하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자.

덧붙이는 글 | * <푸른불꽃>(기스 유스케 지음·이선희 옮김·도서출판 창해)

* 다음 기사에서는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 그리고 그와 연관된 밀실 트릭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푸른불꽃>(기스 유스케 지음·이선희 옮김·도서출판 창해)

* 다음 기사에서는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 그리고 그와 연관된 밀실 트릭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창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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