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7회

등록 2006.09.06 08:07수정 2006.09.0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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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龍雛) 백리현(百理賢)
자(字)는 재원(材元). 봉추 방통과 같은 양양현(養陽縣) 출신으로 산학(算學)과 역리(易理)에 밝고, 박학다식한 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호(號)도 본래는 용추가 아니었으나 세간의 사람들이 함곡과 용추를 싸잡아 표현하다가 굳어진 것이었다. 함곡을 제갈량에 비유한다면 용추는 방통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껄끄럽겠군.”


어쩌면 함곡의 비위를 긁는 소리였다. 하지만 함곡은 개의치 않았다. 풍철한이란 인간이 본래 그런 사람이다 보니 그런 것을 탓하다가는 아예 대화할 생각을 버려야 했다.

“마음이 편치는 않네.”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말에 풍철한은 오히려 놀랐다. 함곡과의 관계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번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상만천의 아래로 들어갔나?”

“십삼 년 전의 일일세.”


네 번째 무리들이 배를 나서기 시작해서 그들의 대화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함곡의 눈은 비록 배에서 하선하는 네 번째 무리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 속은 십삼 년 전의 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네 번째 무리는 몸놀림이 범상치 않은 이십 여명의 남녀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승의 무공을 익힌 것 같은 그들은 분명 상만천을 호위하는 무인들 같았다. 그들은 각기 병장기를 들고 있었는데 하선하자마자 이미 약속이나 한 듯 위치를 잡고 서 있었다.


그들은 몸으로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렬로 서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살벌한 기운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일종의 진(陣) 같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자 그것은 상만천의 보호를 위한 완벽한 진의 형태임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정말 감탄할 정도로 완벽한 진이군. 용추의 능력은 정말 놀라워.”

함곡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벌써 그의 뇌리 속에서는 그 진을 파해할 방법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무공을 익혔나?”

“비기(秘技)를 익혔다고 소문이 났지만 뛰어난 정도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네.”

“아니, 용추가 아니고 상만천 말일세.”

함곡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다. 너무 용추를 생각하다보니 자신의 생각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가 무공을 익혔다면 적어도 동정오우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네.”

“자네답지 않게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정확한 평가일 수 있네. 아무리 뛰어난 호위가 있다 해도 백여 번이 넘는 일급살수들의 보이지 않는 검을 피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 자신이 가공할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말이야.”

함곡의 지적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보호하는 호위들이 뛰어난 자들이라 해도 한계가 있었다. 살수는 언제나 그 한계를 노리는 자들이다. 호위와 그 암살해야 할 대상 사이의 틈이 벌어지는 짧은 순간을 위하여 열흘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살수였다.

더구나 그 횟수가 백여 번이 넘을 정도라면 아무리 완벽한 호위라 하더라도 단 한번의 실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위는 자신의 손과 발을 대신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수족(手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상만천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연무장 쪽에서는 벌써 나무에 도끼질 하는 소리와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목재가 더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호위를 위하여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째 내린 숙수들의 모습도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다섯 번째 무리들은 크고 작은 십여 개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아마 운중보에 건넬 예물인 것 같았다. 처음 두 명의 인물이 들고 있는 큰 상자에는 아마 금원보(金元寶)가 가득 담겨 있을 것이고, 두 번째 상자에는 온갖 보석(寶石)이 채워져 있을 터였다. 세 번째 인물은 아주 조심스럽게 새 조롱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금(金)으로 만든 새 조롱이었으며, 그 안에는 두 마리의 금사작(金絲雀)이 들어 있었다.

각종 귀한 비단이나 기물(奇物)들이 들어 있을 상자는 끝이 없을 정도였지만 일각도 되지 않아 배에서 내렸고, 드디어 선실 문이 열리며 다른 종류의 인물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맨 먼저 모습을 보인 두 사내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유생건(儒生巾)을 쓰고 문사의 입은 단아한 인물이 모습을 보였다.

“저 자가 용추인가?”

“그렇군. 그 역시 직접 왔군.”

그들의 말은 다시 끊겼다. 약간 호리호리한 듯 보이는 오십대 인물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주름살 하나 없는 그는 머리가 반백이 아니라면 삼십대로 볼 정도였다. 그는 촌로들이 입는 허스름한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가 질 좋은 비단으로 몸을 감싼 것보다 더 잘 어울리고 그의 위엄을 돋보이게 했다.

그의 반발자국 뒤로 두 명의 여자들이 모습을 보였는데,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두 여인 모두 궁장형으로 머리를 틀어 올렸다. 한 여인은 몸매가 선연하게 드러나는 붉은색 화복(華服)을 입고 겉에는 매우 얇고 부드러우면서도 속이 비치는 나삼(羅衫)을 걸쳤는데 그것이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함께 욕정을 느끼게 하였다.

또 한 여인은 자주빛 상의에 질 좋은 묵연백접군(墨緣百褋裙)이라는 노란색 치마를 걸치고 있어 아주 고아한 느낌이 들게 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상교교(尙嬌嬌), 노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상민민(尙慜慜)일세. 상만천의 두 딸이지.”

“아들은 없는가?”

“삼년 전에 사내아이 하나를 얻었다고 들었네. 나이도 어리고 애지중지하는 터이니 이런 곳에 데리고 올 이유가 없었겠지.”

그 뒤로 한 명의 면사를 쓴 여인과 네 명의 여인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시선을 줄 여가는 없었다. 이미 상만천과 두 딸로 인하여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딸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무어라 생각하나?”

“상교교는 이미 보주의 둘째 제자인 옥기룡과 혼담이 오고가고 있네. 이 시대 최고의 미남과 최고의 미녀가 맺어지는 것이지. 더구나 옥기룡은 이번 보주의 후계를 이을 것이라 예상되는 가장 강력한 후보자지.”

“첫째 제자인 잠룡검(潛龍劍) 장문위(蔣文偉)를 제쳐두고 둘째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이란 말인가?”

“옥기룡은 철기문(鐵騎門)의 문주인 옥청문(玉淸雯)의 장자(長子)이자 보주를 포함해 그들 친구 다섯을 가리키는 동정오우 중 혈간(血竿) 옥청천(玉淸天)의 조카라네. 아무리 첫째 제자인 장문위가 섬서(陝西)의 패자 만권문(卍拳門)의 후광을 업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력으로는 옥기룡에 비할 바가 아니지.”

그 말에 풍철한은 언뜻 설중행이 떠올랐다. 그는 무슨 일로 철기문의 구천각 인물들에게 쫓기었던 것일까? 철기문의 구천각은 중요하고 위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서지 않는 무리들이다. 더구나 추격하는 그들을 따돌리고 살아남은 설중행은 기이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보주가 그에게 보여 준 관심은 아무래도 마음속에 찜찜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아무래도 그 자식을 데리고 온 게 잘못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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