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대해주면 졸병들은 기어오른다"

[내 젊음을 바친 군대 10] 초급 장교 생활과 베트남 파병

등록 2006.09.11 15:58수정 2006.09.11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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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대장 시절.

소대장 시절.

1962년 봄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술, 담배, 여자와 접촉을 금지한다는 '3금'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아침저녁마다 점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해방감을 만끽하다가도 '자유에서 도피'처럼 문득 쫓기듯 불안한 생각이 밀려올 때도 많았다.


임관 후 난 광주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 교육을 받았다. 이어 전남 화순 동복의 바위산을 타고 오르내려야 했던 유격 훈련 과정도 마쳤다. 유격 훈련은 참으로 힘들었다. 만약 내가 수없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했던 베트남전에 가지 않았다면, 이 유격 훈련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었던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가슴에 유격훈련 이수 배지를 달고 나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자세로 무장한 난 경기도 가평군 현리에 있는 육군 제11사단으로 찾아갔다.

내 첫 보직은 수색중대 제1소대장이었다.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 침침한 불빛 아래 퀴퀴한 사내들 냄새만이 가득한 소대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다른 소대와 함께 사용하는 내무반이었는데, 육사 출신 소대장이 부임했다며 괜히 옆 소대 병사들까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녁 점호 전 자유시간이기는 했지만, 난 병사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 그때였다. 술을 잔뜩 마신 소대향도(부사관)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태권도복을 입고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손바닥을 내보이는 엉터리 경례를 하며 말했다. "소대장님! 태권도 연습하고 피엑스(PX, Post Exchange, 군부대 내 매점)에서 한잔 했습니다."

그 순간 선배들의 이야기가 귓가를 때렸다. "하사관(현 부사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능글능글 귀관들의 머리꼭지에 앉으려 한다! 몽둥이가 최고야! 처음에 버릇을 잘 들여야 해! 무조건 기를 죽여야 해!"

난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야, 향도! 나도 운동을 좋아하지만, 그래 소대장이 부임하는데 술 취해 가지고 들어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난 그의 명치를 향해 정권을 날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소대장으로 부임한 날 내 첫 인사는 이렇게 조폭 두목처럼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주먹맛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 자리에 있던 장병들에게 연설했다. "군인은 군기에 따라 산다. 나는 군기를 확실히 잡을 것이다. 군기에 어긋나면 용서 없다."

'군기' 집착, 일본군 문화의 잔재


주번 사관 완장을 두르는 날, 난 말 그대로 '설치고' 다녔다. "밤이라고 단추 하나라도 풀고 다닌다든지 군화끈을 적당히 매고 걷다가 표 소위한테 걸리면 혼난다. 조심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사단사령부 병사들 사이에 이런 소문까지 났다고 한다.

소문대로, 당시 난 군기를 잡아야겠다는 의욕에 넘쳐 도둑고양이처럼 밤잠을 자지 않고 사령부 직할중대 지역을 순찰하고 다녔다. "식사군기, 면회군기, 오락군기, 휴식군기, 취침군기 등 자유 시간에도 군기를 지켜야 한다. 군기가 빠지면 군인이 아니다!" 당시 우리는 그렇게만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상 이처럼 '군기'에 집착하는 것은 병사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라고 일본군대가 주고 간 오랏줄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을 때 조선인들은 거의 대부분 장교가 아니라 사병이었다.

일본군 간부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조선인 병사들이 민족의식을 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군기를 잡는다며 정신 차릴 수 없도록 들볶아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참이 하급자들에게 마음껏 횡포를 부리는 게 용인되는 감옥 안 질서를 내무생활에 그대로 적용했다.

친일 앞잡이들은 일본군 간부들에게 충성심을 보여주느라 더 혹독하게 조선인 병사들을 닦달했다. 이들은 해방 후 군을 완전히 장악했고, 국군 병사들은 일제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들볶였다. 그동안 군대에서 수많은 의문사가 발생한 것도 이와 관계 있다. 아울러 사관학교에서도 민족의식은 전혀 없이 전투기술과 군기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양산한 것도 광복군이 아니라 일본군 출신들이 군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최근 '전시 작전통제권 조기 환수 반대'를 외치는 이른바 전직 군 고위 간부들을 보며 난 매우 안타깝다. 친일파(혹은 그 후예)와 군사독재 옹호 세력한테서 교육받고 그들 덕분에 진급하면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11사단이 동부전선 '원통'지역으로 이동한 뒤 난 중위로 진급했고, 보직도 제9연대 작전장교로 바뀌었다. 난 원통고개 길 너머에 있는 천도리에서 작계 5027 관련 업무 및 방어진지 확인 작업 등으로 바쁘게 지냈다.

작전장교 생활 1년을 마친 뒤 난 9연대 제1중대장에 임명돼 연대 수색중대와 함께 비무장지대(DMZ)에 투입됐다. 내가 맡은 지역은 보급품을 차량으로 나를 수 없는 건봉산 바로 앞 지피(GP, Guard Post, 감시초소)와 오소동 골짜기의 시피(CP, Command Post, 지휘소)가 포함되어 있는 등 우리 사단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이었다.

당시 난 부하들이란 끊임없이 닦달해야만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잘 대해주면 졸병들은 기어오른다. 시간 여유를 주면 잡생각에 빠져 사고 내기 십상이다. 정신 못 차리도록 바쁘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동정하면 큰 일 저지른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 세뇌돼 인간미가 메마른 난 기계 같은 사람이었다. 전방을 순찰하기 위해 내가 중대 정문을 나서면 전화교환병이 "호랑이 떴다!"며 초소마다 전달하는 소리가 밖까지 들린 것도 이 때문이다.

종갓집 장손, 베트남으로 길을 잡다

중대장으로 근무한 지 9개월쯤 된 1965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던 이기백 소령(육사 11기, 훗날 국방장관 역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가 파월 기갑연대 작전주임으로 내정되었는데 나를 보좌관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겐 군인은 언제든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전장에 나가 목숨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고 특히 선배가 알아주니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는가 라는 심정이었다. 이 기회에 아버님 문제에서 비롯된 짐(아버님은 남로당 간부셨다)을 벗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 난 흔쾌히 베트남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이 소령은 사이공에 있던 주월 사령부 정보참모부로 가 버렸다. 원치 않으면 파월을 취소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난 그냥 참전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기갑연대 11중대로 발령 났다.

그러고 나서 별들도 잠든 고요한 밤에 불침번 순찰을 돌고 있을 때였다. 옆 건물 내무반에서 갑자기 한 병사가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난 못 갑니다. 절대로 못 갑니다. 어머니!"

그 순간, 나도 불현듯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베트남 파병이 결정됐다는 편지가 전해졌을 때, 집안에선 온통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근엄한 모습을 잃지 않으시던 할아버지께서도 종갓집 장손을 사지(死地)에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중심을 잡지 못하셨다고 한다.

무조건 완도로 끌고 내려오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을 받고 어머님께서 부랴부랴 홍천까지 면회 오셨다. 인자하신 어머님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갔고 넋이 완전히 나가신 분 같았다.

"너는 우리 표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종갓집 장손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군인이 됐지만, 너는 가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외아들인 너를 전쟁터에 보낼 순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도 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 자식이란 외아들이건 아니건 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만약 내가 가서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가서 죽게 된다면 그 부모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참으로 넓고 여장부 같으셨던 어머니는 내 대답을 대견하게 받아들이셨는지, '외아들' 논리를 더 이상 꺼내지 않으셨다.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환송행사가 열렸다. 어머님께서 다시 올라오셨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군인들의 거대한 행렬과 환송 행사 분위기에 압도된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시고 그냥 내려가셨다. 그 후 내가 돌아올 때까지 1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마다 온 식구가 장독대 옆에 정화수 떠놓고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한번은 내가 전사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지만, 어머니께서는 "시체를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조상님들의 가호가 있으니 내가 무사히 돌아올 것임을 굳게 믿고 계셨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날마다 한숨만 쉬고 계셨다고 한다. 아침마다 부모님 영정을 바라보며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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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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