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행 배에서 주문한 '황송했던' 그 계란

[나의 젊음을 바친 군대 11] '애국자' 됐던 월남 파병 시절

등록 2006.09.14 18:15수정 2006.09.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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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목숨까지 던져서 전장으로 떠나는 사람은 소총중대 이하 장병들인데도 이들은 진정한 위로와 환송을 받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귀찮게 끌려 다니고 여기저기 행사에 동원되어 매스컴이 요구한대로 목에 힘주어 말하는 사람들의 그럴듯한 배경그림을 만들어주는데 필요한 엑스트라 역만 했다.


반복되는 지루한 연습 끝에 마지막으로 여의도에서 '맹호부대 용사들아!'를 부르며 대대적인 파병 환송식을 마친 다음 우리는 기차에 실려 부산항으로 옮겨졌다. 부산항을 떠나기 전 부두에 배가 정박된 상태에서 또 우리들의 진을 완전히 뺀 그 지긋지긋한 환송 행사가 있었다.

대대장들과 연대장은 윗사람과 거기 모인 지방 유지들에게 질서 정연 멋있는 그리고 사기 높은 듯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진 쇼를 다 했다. 보여주기 위한 행사에 우리 병사들이 얼마나 지쳐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TV에 멋있게 잘나가고 장군들로부터 잘한다는 말을 듣는대만 정신 팔려 있었다.

"줄도 하나 못 맞춰! 이XX들! 줄이 비틀어 졌어! 임마 잘 맞춰! 박수소리가 왜 이리 적어! 크게 좀 못쳐!""빨리 나와! 즉시 들어가! 보이지 않게 꺼져"하며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을 가지고 순전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멋있다 잘한다는 칭찬 소리를 듣기 위해서 인간 몰이꾼이 되어 안간힘을 쓰며 소리소리 질러 우리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너무 시달려 완전 지쳐 있었다.

차라리 빨리 떠나 버렸으면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출발한다 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소대장 몇 명과 함께 잠시 육지에 내렸다. 조국 땅을 마지막 밟아본다는 감격이 북받쳐 발을 구르며 무작정 뛰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미친 사람처럼 '잘 있거라! 내 사랑 내 조국아!' 흙에다 뺨을 데고 이리저리 부비기도 했다. 나의 선조들이 대대로 묻혀계신 나의 고향 완도 쪽을 향해 엎드려 절하고 또 절했다. 할아버지, 어머님, 아버님의 근심어린 얼굴 모습이 자꾸 자꾸 떠올랐다.

"나도 계란이요!" 월남으로 가는 배에서 처음봤던 메뉴판


a 월남 퀴논에서.

월남 퀴논에서. ⓒ 표명열

원래 미 해군들의 배 위 식사가 좋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일류 호텔식당에 못지않을 이름도 모르는 다양하고 풍부한 메뉴가 즐비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음식이 나올까? 식사시간이 기다려졌다.

메뉴판을 보며 각자가 직접 선택해서 주문하는 이런 식사는 처음 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니까 앞사람이 가장 쉬운 단어인 "에그!(egg)"하고 계란을 주문하면 "나도 같은 것으로요!(Me too!)"가 계속 되었다.


사실 당시 우리는 온 계란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었다. 이래저래 애꿎은 계란만 집중적으로 시키는 바람에 얼마 안 있다 동이 나버렸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필리핀 출신의 취사병은 한국 사람들은 무슨 놈의 계란을 그렇게도 잘 먹느냐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며칠 가지 않아서 우리가 아직 일류 음식을 선택해서 먹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지 식사가 통일된 메뉴로 간편하게 바뀌었다. 눈치 볼 필요 없어 차라리 편했다.

대만해협을 지날 때 파도가 높았다. 드디어 월남 퀴논 항에 도착했다. 하선하기 전에 먼저 와있던 선발대 사람들이 승선하여 우리에게 겁을 주었다. 베트콩이 여기저기 우글거리고 있으니 정신 팔면 코비어간다고들 했다. 우리는 너무 긴장하여 마치 적진지를 향해 최후 돌격이라도 하듯이 철모 끈을 내리고 꽂아 칼 자세로 크게 "야!"함성을 지르면서 바꿔 탄 보트에서 모래 위 육지로 뛰어 내렸다.

모를 심고 있는 농부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애써 우리를 외면했다. 굳어 있는 표정이 한눈에 봐도 우리에게 우호적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날고 있고 우리 맹호 부대 용사들을 태운 긴 차량행렬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가거나 말거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하도 전쟁에 시달려 주인인 본인들은 지쳐있고 무관심한데, 괜스럽게 외국 군인들이 몰려 와서 전쟁을 하고 있음에 분노하고 있는 것 같은 창백하고 무관심한 표정이 소름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이런 첫 인상으로 보아 "아! 이 전쟁은 실패다. 졌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월남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기지에 도착하여 휴대품 일제 검사를 실시했다. 병사들은 미군 수송선에서 내리면서 별별 것들을 다 배낭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스푼, 포크, 나이프 한두 개씩은 거의가 다 넣고 있었다. 어떤 병사는 무엇에 쓸려고 그랬는지 수송선 세면대 앞의 거울까지 뜯어 왔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 가난에 쪼들려 살아 온 터이라 죽음을 향해가면서도 그런 하찮은 물건들에 대해 애착을 가진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아 병사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쓴 웃음을 지으며 "검사 끝!" 해버렸다.

"그냥 한 번 해봤지요!"

월남전에서 '맹호부대'하면 태권도를 연상케 할만큼 태권도 붐이 대단했다. 사단사령부로부터 가능하면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에서 태권 연습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베트콩들이 겁을 먹도록 만드는 심리전이었다.

'국군 맹호부대원들은 맨 주먹으로도 호랑이를 잡을 수 있고 적을 때려잡는다'는 식의 소문을 내게 하는 것으로서 상당한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a 월남에서 기갑연대 태권도 지도교관을 하여 사단 시합에서 우승했던 잠면 입니다. 앞줄 두번째 중위 모자 쓴자가 필자입니다.

월남에서 기갑연대 태권도 지도교관을 하여 사단 시합에서 우승했던 잠면 입니다. 앞줄 두번째 중위 모자 쓴자가 필자입니다. ⓒ 표명열

맹호부대는 맨 주먹으로 호랑이도 잡는다?

나는 연대 태권도 선수 지도교관으로 지명되어 우리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빈케 군의 군청에서 태권도 시범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군청 뜰 안에서 한창연습을 하고 있는데 한 월남 소년이 붉은 벽돌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맹호부대 사람들은 누구나 다 태권도를 잘 한다면서요, 이런 벽돌도 깰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내 바로 옆에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서 꺼벙한 모습으로 서 있던 통신병을 향하여 한 번 깨어보라고 그 벽돌을 내밀었다. 그 병사는 서슴없이 문제없다고 했다. 선수들이 벽돌을 놓아주었고 그는 메고 있던 단독 군장을 풀고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난 다음 기압소리와 함께 내리쳐 벽돌을 두 동강내어 버렸다.

"어떻게 그렇게 잘 해 냈느냐? 과거에 격파 연습을 많이 한 것 같다"고 물어 봤더니 전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은 그 병사는 태권도에 별로 관심이 없던 자로서 난생 처음 벽돌 깨는 격파를 해보았다고 한다. 물론 손은 퉁퉁 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냥 한 번 해 본 것이 그렇게 되었다!"라고 멋 적은 듯 머리를 극적이며 저쪽으로 피해 사라졌지만 사실은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온힘을 다 쏟아 친 것이 분명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외국에 파병된 군인들은 모든 면에서 훨씬 더 애국자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생도 때 태권도 공인 2단을 받아 격파연습을 너무 해서 지금도 비가 오려하면 오른 쪽 주먹의 뼈마디가 아프지만 벽돌을 깨어본 경험은 없다.

우리가 월남 전투에서 미군들 보다 더 잘 한 활동이 있었다면 대민 지원 업무라 할 수 있다. 물론 미군 측에서 제공해준 쌀, 생필품 등이 풍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형편이 어려운 집을 방문하여 나누어준다든지 하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아무래도 동양적인 정서로 서로 통하여 가까운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보다 효과적으로 추진하였을 것이다.

이런 민사활동은 연대 급 이상 부대의 민사업무 담당 장교에 의해서만 추진되었다. 작전 지역 내의 민간인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전투원들에 대해서는 대민 심리전 활동에 대한 개념과 지침이 설정되어있지 않았다. 물론 이에 대한 훈련 등의 준비가 없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 군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다. 민사활동이야말로 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 정부의 방침에 의해서만 지시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통일이 이루어지던 간에 일단은 계엄령 사태가 될 것이고 어떤 목적으로든지 북한 지역에는 제일 먼저 우리 군대가 들어갈 텐데 심리작전 면에서의 이런 준비가 안 되어있는 것이다.

전시작전권이 환수되면 이런 부분까지 면밀히 검토하여 우리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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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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