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 노닐던 섬에 관광객 모여들다

[섬 이야기46] 전북 군산시 선유도

등록 2006.09.19 09:51수정 2006.09.1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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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유도 인근 어장에서 멸치잡이에 나선 어선들의 불빛

선유도 인근 어장에서 멸치잡이에 나선 어선들의 불빛 ⓒ 김준

섬으로 둘러싸인 섬 속의 섬 선유도,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들이 놀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선유도라지만 본래 이름은 군산도였다.

고군산군도의 첫 관문은 선유도 포구로 들어서는 깊은 갯골 '진도깡'(주민들은 이렇게 부른다)에서 시작된다. 갯골의 오른쪽에는 신선들이 사는 마을임을 알리려는 듯 하늘과 맞닿은 두 개의 바위기둥이 방문객을 맞는다.


왼쪽에 자리한 무녀도를 등뒤에 두고 포구에 내리면 길가에 즐비한 자전거와 민박 손님을 실어 나르는 봉고차가 기다린다.

고군산군도의 등대, 망주봉

고군산군도를 대표하는 섬이 선유도라면 선유도의 상징은 망주봉(望主峰)이다. 152m의 낮은 바위산이지만 망주봉은 방문객들에게 각인되는 고군산군도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송나라의 사진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동경>에는 '군산정은 바다에 닿아있고, 뒤에는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길이나 치솟아 있다'라고 적고 있다.

망주봉이라는 이름은 옛날 이곳 선유도에 유배된 충신이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북쪽의 한양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여 붙은 명칭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천년 임금을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부부이야기도 전한다(출처, 군산도서지). <정감록>에 뿌리를 둔 천년임금의 이야기는 이렇다.

"이씨 조선 다음에는 정씨가 계룡산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그 후에는 범씨가 고군산(선유도)에서 천년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이야기를 믿고 천년도읍을 이룰 왕이 북쪽에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북쪽을 보고 서 있다 지쳐서 바위가 되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이 더욱 걸작이다. <정감록>에는 고군산에 천년의 도읍이 되는 때가 퇴조(退潮) 300리 즉 바닷물이 현재의 해안선에서 300리 밖으로 물러난 후라는 것이다. 새만금사업으로 야미도와 신시도까지 육지와 연결되어 차량이 드나들고 있고, 머지않아 신시도와 무녀도를 연결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선유도는 육지나 다름없기 때문에 <정감록>에서 예언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새만금사업을 빌미로 선유도를 중심으로 국제해양관광도시를 꿈꾸는 군산의 희망이 예언처럼 현실로 드러날지 흥미롭다.


a 구름에 쌓여 신비감을 더해 주는 망주봉

구름에 쌓여 신비감을 더해 주는 망주봉 ⓒ 김준

a 전월리에서 본 망주봉

전월리에서 본 망주봉 ⓒ 김준

망주봉과 함께 선유도에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가 밭너머 마을 옆 망주봉 기슭의 오룡묘다. 오룡묘는 매년 당제와 3년마다 별신제를 모셨던 제장이다. 오룡묘에 모셔진 오구유왕, 명두아가씨, 최씨부인, 수문장, 성주 등 5매의 화상과 오룡묘 뒤쪽 임씨 할머니당에 모셔진 산신님, 칠성님, 임씨할머니 화상 모두 도난을 당했다고 전한다.

선유도 별신제는 한때 수군절제사가 주관했었지만, 진이 없어지면서 마을에서 주관하고 경비는 칠산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선주들이 부담했다. 당시에는 10년에 한번 씩 별신제를 거행했는데, 별신제에는 무당만 해도 3명, 연주하는 재비들이 5명 동원되어 삼현육각이 볼만해 육지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올 정도였다.

별신제는 60여 년 전, 그러니까 조기잡이가 성하던 시절에 마지막 거행되었다. 그 후에도 별신제는 중단되었지만 조기잡이를 나가는 어민들은 초사리(봄철 첫 작업을 해서 잡은 조기)에 잡은 제일 좋은 조기를 골라 임씨 할머니당에 바치기도 했다.

충무공은 선유도에서 뭘 했을까

충무공과 선유도의 인연도 매우 각별하다. 충무공은 선조30년(1597)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북상하던 133척의 배를 물리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이 싸움 이전에 충무공은 모략으로 삼군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났고, 원균이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칠천량전투에서 원균은 전사하고 수군은 회복 불능의 패전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충무공은 지친 병사들과 전함을 추슬러 우수영과 임자도 그리고 칠산바다를 거쳐 6일 후 9월 21일 군산도(선유도)에 도착했다. <경조실록>에는 "호남의 해로에서 해남 우수영이 가장 요해처이고 이곳을 지나면 임자도가 요해처이고, 여기에서 칠산 앞바다를 지나면 고군산(선유도)이 또 하나의 요해처이다", <정조실록>에는 "고군산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큰 호수가 있다"는 기록에서 보듯 선유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항구였다(참조, 군산도서지)고 적고 있다.

충무공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함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을 장소가 진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충무공이 아산의 가족과 집이 적에 의해 분탕질을 당했다는 소식도 선유도에서 접했다. 충무공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선유도에 머물렀다.

a 새터마을에서 본 진말, 진말에는 '진터'가 남아 있으며, 충무공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새터마을에서 본 진말, 진말에는 '진터'가 남아 있으며, 충무공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김준

선유도는 고려시대에 수군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긍의 기록에서 보면 "군산도에 도착하니 6척의 배에 무장병을 싣고 나와 영접했으며 배가 군산도로 들어가자 깃발을 든 병사가 100여 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선유도는 해상교역을 활발하게 하던 고려시대 군사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던 시기에 수군기지를 강화했으며, 조선 태조 6년(1397)에 선유도에 수군만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세종 때 군산으로 옮기고, 망주봉 기슭에 수군기지를 설치했다. 당시 이곳 수군기지는 절제사가 파견되어 임피, 옥구, 만경, 김제, 부안, 고창, 무장, 영광 등 8개현의 해상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잠시 폐쇄되었다가 1600년에 선유도 중심마을인 진말에 다시 설치되었다.

<정조기록>에는 군산도의 가구수는 모두 600호라고 적고 있어, 30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할 정도로 큰 규모였을 것이다. 지금도 진말의 우체국 뒤쪽 산기슭 진터가 남아 있고 기와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체국 인근에는 5기의 수군절제사 선정비가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비석들은 길 위쪽 진터의 옛 길가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보다 더 많은 비석들이 있었지만 새로 도로를 만들면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a 남악리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어민들(2004년 10월)

남악리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어민들(2004년 10월) ⓒ 김준

a 김 양식을 위해 김발을 설치하는 어민들(2004년 10월)

김 양식을 위해 김발을 설치하는 어민들(2004년 10월) ⓒ 김준

선유도는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관리도, 명도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호수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바다는 일찍부터 어민들의 생업공간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선유도를 가는 유람선을 타고 풍력발전기를 세워두고 새만금사업이 친환경사업이라 시위하는 비응도를 지나 20여 분 쯤 가다보면 바다에 줄지어 떠있는 부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김 양식 시설로, 조류가 좋으면서 파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선유도 앞바다가 양식의 적지였다.

아름다운 어촌마을

선유도는 진말, 새터, 밭너머, 남악리, 통계 다섯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번창한 진말은 출장소를 비롯해 식당과 숙소가 집결해 있는 곳이다. 남악리 마을 앞 어장은 혼합갯벌이 잘 발달해 있다. 이곳에서는 바지락은 물론 낙지를 비롯해 박하지(게)가 많이 잡힌다.

남악리는 2년 전까지 겨우 2~3집 정도만 민박을 했었지만 지금은 펜션을 비롯해 숙박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남악만이 아니라 진말은 남악으로 넘어오는 밭너머 마을이나 읍동 반대쪽에 위치한 통게마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밭너머 마을 앞에는 꽤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벌어먹던 밭이었지만 지금은 묵히고 있다. 선유도에서 가장 넓은 밭을 가지고 있고 논농사도 지었지만, 지금은 일부 밭만 벌어먹고 있다. 오죽했으면 마을지명을 밭너머라고 했겠는가.

a 선유도 남악리에서 본 망주봉(왼쪽)과 진말과 장자도

선유도 남악리에서 본 망주봉(왼쪽)과 진말과 장자도 ⓒ 김준

a 선유도 통게마을과 포구

선유도 통게마을과 포구 ⓒ 김준

논과 밭이 부족한 탓에 옛날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풍선배나 중선배를 타고 조기잡이를 하며 생활했다. 1980년대 김 양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선유도를 비롯해 고군산군동 일대의 어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특히 이 무렵은 고군산군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교통도 불편하여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수입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였다. 관광패턴이 변화된 탓도 있지만 인터넷을 비롯해 방송에 선유도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였다.

선유도의 마을 중에서 어촌의 풍취가 가장 강한 곳은 통게마을이다. 아담하게 만입된 이 마을은 무녀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고개를 넘어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이다. 무녀도와 선유도 사이에 진도깡이라는 갯골에 접해 있는 탓에 어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특히 진도깡 끝머리에는 세 섬이 바람을 막아주고, 더 멀리는 관리도가 기다랗게 놓여 있어 샛바람도 막아주어 마을입지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a 여름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선유도 해수욕장

여름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선유도 해수욕장 ⓒ 김준

바람과 파도가 가져온 모래밭

최근 선유도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선유해수욕장'과 '낚시'때문이다. 모래밭이 넓고 길어 명사십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선유도 해수욕장은 1965년 옥구군 시절에 개장하여 2005년에만 해도 6만 4000여 명이 찾을 정도였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가져온 모래는 진말과 망주봉을 연결시켰다.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은 모래가 파도에 밀려와 바람에 날려 만들어낸 사구가 망주봉 앞에 모래밭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이곳 모래밭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해당화가 만발한 백사장으로 수군진의 병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고군산지역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목숨을 앗아가는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모래갯벌에는 바지락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백합양식'을 시도하고 있다. 이것도 새만금의 여파이기도 하다. 전국에 백합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새만금 갯벌이 사라질 위협에 처하면서, 최근 몇 군데 새로운 생합서식지를 조성하고 있다.

선유도 해수욕장 앞에는 솔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을 기준으로 밭너머마을 쪽으로는 양식장이 마련되어 있고, 진리쪽으로는 관광객들이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갯벌이다. 해수욕객이 몰려드는 여름철이면 이곳에는 출입을 막는 줄이 쳐진다.

a 선유도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들(2004년 10월)

선유도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들(2004년 10월) ⓒ 김준

여름철에는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팬션을 비롯한 민박집들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잡기 어려울 정도란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모래밭이 준 선물이다. 고기잡이도 예전 같이 않지만 새만금으로 물길이 막히면서 더욱 심해졌다. 능력이 있는 주민들은 관광업으로 전업을 하고, 배는 선상낚시나 보트관광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은 모래밭이 가져다 준 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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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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