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40회

등록 2006.09.25 08:11수정 2006.09.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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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찾아낼 것이 없으면 옷을 입히게. 이 자는 분명 독룡아에 의해 순간적으로 죽었을 테니까 더 찾아낼 것도 없을 걸세.”

풍철한이 앉은 채로 고개만 돌리며 물었다.


“자네답지 않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군.”

“이미 보주가 진짜 독룡아라고 확인해 주지 않았나? 더구나 독룡아라면 흔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즉사했을 것이니 매우 분명한 일이 아닌가?”

“단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 자의 시체에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을 걸세.”

“무슨 근거로?”


“이 자는 매우 특이한 취미를 가진 자였을 걸세. 그 때문에 이 자의 기이한 취미를 아는 경 첩형이 당황했을 것이고, 이제 곧 그것을 밝혀낼 걸세. 결국 이 자의 시신에서 발견한 것은 이 자가 죽기 전에 무엇을 했느냐는 것 정도지.”

풍철한은 시신에 옷을 대충 입혀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풍철한은 손을 털며 말했다.


“자넨 정말 독룡의 후인(後人)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겐가?”

함곡은 고개를 끄떡였다.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어쩌면 후인이 아닌 독룡 그 자신이 나타났었는지도 모르지.”

“무슨 말인가? 독룡은 아니 구룡 모두 이십육 년 전 동정호 군산에서 죽었다고 알려졌지 않은가?”

“누가 그것을 확인시켜 줄 텐가? 구룡의 생사여부는 오직 구룡과 동정오우만이 알 뿐이네. 하지만 잘 기억해 보게. 동정오우 중 누구라도 구룡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들 입으로 직접 말한 적이 없네. 다만 세인들이 그 뒤로 구룡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그들이 죽었다고 단정을 내린 것뿐이네.”

풍철한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이 강한 부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나이가 칠순 중반, 두세 명은 팔순에 다 달았을 걸세. 더구나 독룡 그 자신이 직접 이곳에 왔다면 이 자를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풍철한의 말에 함곡이 비로소 아주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자네가 본 것을 털어 놓을 때가 되었네. 자네의 환시 말일세. 대체 무엇을 보았나?”

그의 물음에 갑자기 풍철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언제나 내가 본 것을 엉터리라고 하면서 또 듣고 싶은 겐가?”

“매우 듣고 싶네.”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는 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의 환시는 지금껏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네.”

“자네는 역시 고약한 친구로군. 내가 본 흉수는 두 사람이네. 나이는 많지 않은 것 같았네. 한 사람은 이 자를 살해한 후 창문으로 나갔고, 또 한 사람은 방문을 열고 나갔네.”

“누구던가?”

“얼굴은 보지 못한다네. 내 환시능력은 엉터리지. 내가 본 사람의 얼굴이어야만 그 형상이 또렷해지는 약점이 있다네. 죽은 자의 얼굴은 분명 떠올랐지만 흉수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군. 그것이 내 한계일세.”

함곡은 어느덧 얼굴을 굳히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풍철한의 환시능력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왜 흉수가 이 자를 죽였다고 생각하나? 더구나 독룡 자신이거나 그 후인이거나 이 자를 죽여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동창의 당두인 서교민을 동정오우에게 모든 영광을 빼앗기고 사라진 구룡이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현재 상황에서 죽일 이유가 있다면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구룡의 존재를 운중보에 알리는 것. 그렇다면 죽음은 이 자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운중보에 구룡이나 구룡의 후인이 스며들 수 있을까?

24

구룡은 아홉 명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무림을 한 손에 쥐었던 아홉 명의 패자(覇者)를 일컬음이었다. 대명(大明)이 세워지면서 황실과 관의 도움을 받았던 구파일방은 풍부한 부(富)로 인하여 오히려 부패하기 시작했다.

관료와 부호들의 지원금도 그들의 청정무구한 도장(道場)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변질시켰고, 사이한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은 일반인들 사이에까지 돈을 주고 사야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그들의 부는 더욱 쌓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도화선은 청정무구의 도장인 무당(武當)이었다. 태조 때부터 무당의 도사들을 측근에 두려했던 황실은 후대에 이르러 무당과의 교류가 더욱 넓어지자, 동창에서 환관을 파견해 무당을 지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청정도장의 무당산은 황음(荒淫)과 음모의 온상이 되었다.

다른 구파일방 역시 그 사정은 비슷했다. 황실과 관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뿐 아니라 이권과 협잡으로 인하여 토지가 늘어나자 그 소작에 의한 수입만으로도 쓰고 남을 정도였으니 수련과 공부는 이미 물 건너 간 셈이었다. 무림은 관을 등에 업은 구파일방으로 인하여 혼탁해졌고, 구파일방의 독단적인 결정이 무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서 나타난 불세출의 영웅들이 구룡이었다. 그 이전에도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구파일방에 대하여 반기를 든 인물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구파일방의 위세를 꺾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아홉 명의 걸출한 인물들이 구룡산(九龍山)에 모여 회합을 갖고 피를 갈라 형제가 되니 그 이후로 그들을 구룡이라 부른 것이다.

그들의 등장으로 무림은 칠년간 격랑에 흔들렸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구파일방인 것 같았다. 너무나 안이하게 무림을 좌지우지한 구파일방을 용서하지 않았다. 구파일방 중 세 개 문파가 그 맥이 끊기고, 나머지 육파일방도 일시에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 무림이 구룡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되었고, 소림을 비롯한 육파일방은 봉문(封門)한 채 그 맥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누렸던 부(富)와 명예는 사라졌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굴욕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 쇄신을 가져오게 했고, 자신들을 바라보게 했다. 배와 옆구리에 찐 살을 빼고,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 하지만 이미 나태해진 그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굴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룡의 신화를 종식시킨 인물들은 결국 운중검(雲中劍) 나군백(羅君白)을 위시한 동정오우였다. 그들이 나설 때만 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동정오우는 열두 번을 패했고, 세 번을 이겼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완벽한 세력을 형성한 구룡은 동정오우의 끈질긴 도전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고 열두 번을 이겼지만, 단 세 번 패배로 인하여 그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패한 세 번 중 한번이 마지막 동정호의 군산혈전이었고, 그곳에서 패한 이후 구룡은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구룡과 동정오우의 차이점은 한 가지였다. 동정오우의 세력은 아무리 패해도 금세 회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구룡이 이끄는 세력은 패할 때마다 힘이 약화되어갔다. 그것은 사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차이로 인해 구룡은 사라졌고, 동정오우는 무림을 움켜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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