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정말 고따구로 할 거야?

개그 프로에서 오랜만에 살아난 풍자에 박수를

등록 2006.10.07 15:42수정 2006.10.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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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집안에서 없앨 정도는 아니지만 어떤 프로를 보겠다고 마음먹고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TV를 본다 해도 그저 채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특히 드라마...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가운데 제 시간 방영분을 챙겨서 본 적이 없다.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에 그 드라마의 화면이 소개되면 아, 저게 그 드라마였구나... 이럴 뿐이다.

요즘 인기라는 <주몽>도 그렇고, <올인>이나 심지어 <모래시계>조차도 정말 단 한번도 정시 방영분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드라마들은 활자매체로 내게 더욱 친숙하다. 인터넷에 뜬 기사들을 보면서 아, 요즘 이런 드라마가 유명하구나, 이렇게 짐작한다.

이렇게 산 지가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하긴 신문조차도 정신건강(?) 생각해 끊은 지가 오래다. 요즘은 "내가 지적 정서적으로 너무 편식을 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내심 느낄 정도다. 주위 사람들이 화제를 삼는 드라마 얘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나도 아는 것처럼 맞장구나 치고 있으려면 더욱 그렇다. 가족들이야 아예 내 앞에서 TV 얘기 꺼내는 것을 포기한 상태이고.

거창하게 TV 유해론이니 뭐니 하는 명분 때문에 의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참고 보고 있기가 힘들 따름이다. 하긴,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유쾌하게 보고 즐겁게 웃거나 몰입하는 프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기대를 걸고 TV에 매달리기에는 우선 그런 '행운'의 확률이 너무 낮다.

남다른 방청객들의 반응

그런데 최근에 그런 행운을 만났다. 정확하게 언제 처음 '사모님'을 만났는지 기억에 없다. 어디선가 얘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동영상을 찾아봤고, 지금은 팬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개그야> 방영 시간을 기다렸다 자리에 앉아 보지는 않는다. 생각이 날 때마다 인터넷에서 동영상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우연히 TV에 얼굴 비치는 '사모님' 김미려의 활동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정도다.

'사모님'이 상당히 뜬 것 같은데도 이 코너가 왜 떴는지에 대한 분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묘하다. 이보다 훨씬 별볼 일 없고 허접한 코너나 인물들도 좀 떴다 싶으면 이런저런 분석들이 인터넷에 도배를 하던데.

내가 보기에는 우선 방청객들의 '사모님'에 대한 반응이 남다르다. 개그 프로그램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프로그램이나 코너에 대한 방청객의 반응은 순수한 관객으로서의 반응 외에 방송사측의 '분위기 띄우기'를 위한 나름대로의 협조(여우울음이라고 그러던가?)가 상당히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모님' 코너에 대한 방청객들의 반응은 약간 다르다. 정말 열광적이고, 무엇보다 그 반응의 성격이 다르다.

방청객들이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지 못하고 그냥 자지러진다. 사모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고 일체화하는 것이 느껴진다는 얘기다. 흔히 하는 말로 '몰입'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놀랍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자신도 사모님의 행동 하나, 발언 하나하나에 언제인지 분명치 않지만 '나도 저런 것을 현실 속에서 경험했다'는 것을 되새기곤 했다.

그런 '사모님'의 표현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운전해." 너는 알 필요 없으니 이것저것 묻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꾸역꾸역 하라는 말씀이다. 구체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저런 의미의 말을 듣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 남녀노소 불문하고 말이다.

"일 고따구로 할 거야?" 이거야말로 표현 그대로이다. 듣는 자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이 말.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 표현을 적지 않게 써먹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


"그만그만 딱 거기까지. 난 그 각도가 제일 좋더라." 이 발언을 할 때 사모님의 허덕이는 고음 발성이나 과장된 태도 등을 보면 그가 지금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정말 섬찟한 것은 가진 자들, 높은 자들이 아랫것들한테 요구하는 것의 그 수준이 얼마나 까다롭고 그 기대에 맞추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헌신을 강요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키는 자가 까무러칠 정도의 그 '각도'를 만들어내려면 시킴을 당하는 자는 도대체 얼마나 자신의 에센스, 즉 노동과 정성을 쥐어짜야 한다는 얘기일까.

"나 ~~에 푸욱 빠졌어." 우선 먹고사는 일 말고도 뭔가에 푸욱 빠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와 무관하게 자신이 평가한 그 무언가의 가치를 나름대로 주장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차이가, 거리가 느껴지는 것이다.

"드르렁~ 누구세요?" 자신의 코 고는 소리에 놀라 "누구세요?"라고 묻는 사모님. 존재는 천박하고 야비한데 자신의 인식은 그것과 무관하게 고상해지고 싶어하는 허위의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느낀다.

'강남 사람들'의 모순과 허위의식

이밖에도 많다. 나 욕 먹었어, 문방구에서 샀어... '사모님' 코너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나라를 틀어쥐고 움직이고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일을 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기본 업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좀더 노골적으로 지적하자면 '강남 사람들'의 모순과 허위의식이다. 이들의 존재와 의식 사이의 도저히 화해 불가능한 거리다. 사실 '사모님'이란 코너 이름에서 빠진 것이 이 '강남'이라는 수식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모순이 집약되어 결론처럼 드러나는 것이 코너 뒷부분의 "야~ 생까냐(맞짱깔래 등)" 발언 부분이다. 고상 모드를 유지해오던 사모님의 발언과 행동이 드디어 껍질을 깨트리면서, 겉으로 드러난 고상 모드 한꺼풀 아래에 숨겨진 그 본질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방청객들의 카타르시스는 절정에 이르는 것 같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존재, 자신들보다 훨씬 위에서 자신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그 존재의 본질은 실상 허구에 가득찬 것이고, 그들의 아래에서 비참하게 뒹구는 우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사실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이 코너에 대한 방청객들의 반응이었다. 이런 경험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구나 하는 발견이었다. 게다가 방청객들은 아직 한참 젊고 발랄한 여성들이 많았다. 저들도 이렇게 '사모님'의 행동을 많이 보고 들었다는 것인가? 하긴 그렇기에 저들이 저렇게 자신을 잊을 정도로 몰입하는 것 아닌가?

너무 고루한 관점일지 모르지만 나는 예술의 핵심,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바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 진실을 드러내는 표현 부분은 엄청난 힘과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지속성과 보편성을 갖는다. 개그나 코미디에서는 이것이 바로 '풍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실 개그나 코미디에서 풍자가 죽으면 그 위력과 존재 이유는 거의 사라진다. 나는 '사모님' 코너에 사용된 표현들, 내가 인용한 저 표현들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에서 역사적 가치를 갖는다고 믿는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내가 이런 감동을 느낀 것은 얼마 전에 죽은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코너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역시 우리나라에선 회장님이나 사모님처럼 '님'자 붙은 분들의 위력이 대단하고, 그만큼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 아닐까. 하기야 '사모님' 코너에도 얼굴 드러내지 않는 '회장님'이 계신다. 김형곤의 회장님이 2선으로 물러난 자리를 김미려의 사모님이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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