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수업'... 낙엽 위에 편지를 썼습니다

등록 2006.10.20 11:37수정 2006.10.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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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짜증 나!"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요즘 학교에는 그런 아이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수업시간에도 그런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이들 식으로 말하자면 정말 '왕짜증나는' 일이다. 나는 못 들은 체 하려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이렇게 짜증을 부리고 만다.

"야, 짜증난다는 말 좀 그만해라. 정말 짜증난다."

아이들도 짜증을 부리고 선생도 덩달아 짜증을 부리면 교실은 짜증의 난장판이 되고 만다. 누군가는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

"미안, 미안. 선생님도 짜증을 부렸네요. 오늘 창의적 재량활동 시간에는 가을수업을 하려고 이렇게 낙엽까지 주워 왔는데. 자 이 낙엽을 한 번 보세요. 여기 구멍이 뚫려 있지요? 왜 이런 구멍이 뚫려 있는 걸까요? 그래요. 벌레가 먹어서 그래요. 여러분 언제 나무에 달려 있는 나뭇잎을 한 번 올려다보세요. 나뭇잎마다 이렇게 구멍이 나 있어요. 이 나뭇잎이 벌레의 먹이가 되어준 거지요. 어때요? 이 나뭇잎이 좀 기특해 보이지 않나요?"

바로 그때였다. 교실 뒤편에서 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아, 짜증나!"


난데없는 곳에서 날아온 주먹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거의 같은 순간, 몇 아이의 눈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여 준 까닭이었다.

얼른 그 희망의 불빛을 향해 눈을 돌린 것이 잘한 일이었다. 최고의 사기꾼은 남을 속이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속인다고 했던가. 나는 방금 전에 짜증을 부린 한 아이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린 사람처럼 이렇게 신나게 지껄이고 있었다.


"이 나뭇잎들은 점심시간에 정문 근처에서 주워온 거예요. 그곳이 선생님 청소구역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나뭇잎들은 선생님 덕분에 쓰레기가 될 신세에서 낙엽이 되었지요. 그것도 여러분처럼 예쁜 손에 안겨지는 행운의 낙엽이 되었네요.

자, 이 낙엽을 하얀 종이에 붙이고 낙엽에게 편지를 써 봐요.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도 좋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할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여러분 자신이에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세요.

그동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한 번 생각도 해보고요. 자꾸 짜증을 부리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에요. 어쩌면 가장 나쁜 습관일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짜증을 부리지 않거든요."

가르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기다릴 줄 아는 마음, 곧 인내심이리라. 그리고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얼른 눈길을 돌리는 것. 그리하여 어둡고 불길한 조짐들을 빨리 꺼버리는 것, 바로 그것이리라.

가을수업이 시작된 지 10분이 채 못 되어 교실은 마치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가만 보니 방금 전까지 짜증을 부리던 그 아이도 언제 그랬느냐는듯 어느새 교실의 평화로운 그림 속에 함께 동화되어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손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두 반에서 가을수업을 했다. 수업이 끝나자 퇴근할 생각도 잊은 채 아이들이 하얀 종이 위에 깨알같이 써놓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교사들은 여건상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날 수밖에 없지만 아이들은 개인적인 아픔을 갖고 있다는 것. 교사의 눈에는 모두 철부지 같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속 깊은 아이들도 많다는 것.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가끔은, 아주 가끔은 아이들을 포기하고 싶거나 미운 생각이 들었던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면 관계상 아이들이 쓴 글의 일부만을 소개한다.

a 가을수업

가을수업 ⓒ 안준철

낙엽에게

헬로우~ 낙엽아. 너는 너의 삶에 최선을 다했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너는 벌레 먹은 낙엽이지만, 벌레에게는 맛있는 먹이가 됐잖아. 그리고 너는 행운의 낙엽이야, 첫째로 쓰레기 속에 들어가지 않고 이쁜 낙엽이 되었다는 게. 그리고 이렇게 나에게 왔잖니?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아름다운 낙엽이 되었다.' 그러니까 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낙엽이양~. 앞으로도 젤 행복한 낙엽이었으면 해.

나에게

○○야, 안녕! 요즘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너한테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괜찮아졌잖아. 그러니까 너는 행복한 아이야. 전혀 불행하지 않아. 그러니까 계속 화이팅하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려무나. 슬프고 우울하고 짜증나도 네가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꼭 가지고. 알았지?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자. 미움은 미움을 낳을 뿐이니까. ○○야, 사랑해!

a 가을수업

가을수업 ⓒ 안준철

상처받는 날

어느 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네 주제를 알아라. 네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 나는, 나를 달래고 또 달래 봐도 웃음을 잃고, 희망을 잃은 것처럼 주저앉게 됩니다. 또 다시 괜찮다. 괜찮다 해봐도 앞이 자꾸만 깜깜해 보입니다. 그리고 눈물도 앞을 자꾸만 가립니다.

웃음 짓기 힘든 날

나는 씩씩하게 생각을 고쳐보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앞이 너무도 깜깜해 보입니다. 가다가 넘어질 것 같아 두렵기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믿습니다. ‘열정’이라는 빛이 나의 꿈을 밝혀 줄 것입니다.

그리운 친구에게

곁에 있어도 그리운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나를 항상 바로 세워주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지금 너무 힘들어합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말합니다. 처음 그 빛났던 때로 돌아간다. 걱정 하지마! 조금도 늦지 않았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처럼 내가 정말 사랑하는 곳에 서 있는 반짝이는 '나'에게로 달려가자. 손 잡아줄게. 희망이, 생겼으면, 했습니다. 지금도, 너무 예뻤던 친구가 너무 그립습니다. 나는, 그 친구를 믿습니다.

a 가을수업

가을수업 ⓒ 안준철

단풍에게

이런 편지는 처음이라 낯설어… 내가 낙엽이나 나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가끔 고민이 있을 때 창가를 보고 있으면 니가 보여. 그럴 때면 그 고민들이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나에게 떨어져 나가는 거 같거든… 그리고 단풍!!! 난 널 보면 항상 신기해하면서 이쁘다고 생각했어. 녹색과 빨강으로 변하는데 그게 그렇게 이뻤어. 단풍아, 오래 오래 이쁜 모습 보여 줄 거지?

안녕!

난 ○○이라고 하는데, 나 오늘 처음 알았어. 너를 희생해 벌레를 살린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 전에는 쓰레기 또는 고구마 또는 감자 구워 먹을 때 많이 썼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참 내가 한심한 것 같아서. 이제부터는 낙엽도 하나의 생명이라 보고, 태우지 않고, 쓰레기라고 안 하면서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쓸게. 참, 내가 여태껏 태운 거 미안. 그런데 고구마는 낙엽으로 먹어야 제 맛이야. 그럼 한 달 후에 다시 쓸게. 너의 ○○이가.

a 가을수업

가을수업 ⓒ 안준철

나에게

안녕! 난 ○○라고 해. 난 너무 소심하고 이기적인 거 같아. 친구들이 장난 친데도 나는 막 친구들한테 화만 내고 싫게 만드는 거 같아. 어쩔 때는 친구들은 예쁜데 나는 왜 못생겼을까? 생각이 들어. 힘들 때가 참 많아. 어떨 때는 좋고 또 어떨 때는 밉고 슬프고 그래… 하지만 낙엽을 보면서 앞으로는 성격도 고치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낙엽아 날 도와줄 수 있겠니? 나도 이 낙엽을 보면서 노력할게.

사랑하는 ○○에게

지금은 창의적 재량활동 시간이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쓰래. 근데 선생님이 그게 자기 자신이래.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대. 오늘 그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았어. 너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난 나를 먼저 사랑할 생각이야. 정말 그럴 거야.

사랑하는 영어 선생님께

선생님! 벌써 2학기에요. 애들 비유 맞추시느라고 힘드시죠? 철없는 저희들을 예쁘게 봐주시고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선생님! 힘이 드셔도 웃는 게 좋아요. 항상 스마일 아시죠?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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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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