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3회

등록 2006.11.02 08:08수정 2006.11.02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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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보주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않더니 이윽고 함곡과 풍철한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 결정한 듯 굳은 의지가 표출되고 있었다.

"이 사건 역시 두 사람이 조사해 주게. 매송헌 쪽에도 또 다른 사건이 난 것 같으니 그쪽 역시 마찬가지고……, 어찌되어 이리 갑자기 불행한 일이 연속해서 터지는지…."


신태감의 죽음 앞에서는 운중보주도 초연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근심과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본 보주로서도 더이상 발생하는 사건을 좌시할 수 없네. 본 보주 역시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할 것이네. 더 이상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들에게 처음부터 맡긴 일에 대해서는 물론 간섭하지 않을 것이네. 어제 본 보주가 자네들에게 한 약속 역시 변함이 없네. 최선을 다해주게."

운중보주 역시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으로 이 사건에 손을 대겠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운중보주는 함곡과 풍철한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 차라리 '자네들은 못 믿겠으니 이만 운중보를 떠나주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그런 바람을 뒤로하고 운중보주는 몸을 돌려 그 방을 나섰다. 장문위와 추교학이 급히 그를 뒤 따랐다. 그들이 모두 방에서 나가자 풍철한이 경후에게 물었다.

"서당두의 방에는 왜 간 것이오?"


"능효봉을 찾으러 갔었소. 혹시나 해서 그자가 자고 있는 방에 가보았지만 없었소. 그래서 시녀에게 물었더니 서당두의 방에 가는 것 같다고 해서…."

갑자기 경후는 왜 능효봉을 찾았던 것일까? 그래도 약간 내막을 알고 있는 풍철한은 이해가 될 듯도 했다. 풍철한은 힐끗 설중행을 보았는데, 설중행은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벽에 걸린 족자를 보고 있었다. 아예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이상했다. 비밀조직이었다고는 하나 분명 동창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신태감은 그의 상관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설중행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곳에 있는 것이 매우 지루하다는 표정이었다.

허나 겉모습과는 달리 설중행은 내심 지금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운중보 내에서 옥음지를 익힌 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백도 자인. 어제 저녁 그는 분명 옥음지를 사용했었다. 그것이 오히려 설중행에게 더욱 도저히 알 수 없는 혼란을 가져왔다.

그는 왜 갑자기 자신을 기습했던 것일까? 그의 독문절기는 도(刀)다. 철담의 진전을 이어받은 그는 사부와 달리 기형도가 아니라 정통의 도를 사용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또한 갑작스러운 혈도의 이상 현상이 없었다면 어제처럼 쉽게 제압당할 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백도 자인의 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려웠다.

그가 왜 갑자기 옥음지를 사용한 것일까? 옥음지를 사용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백도는 마치 옥음지를 익힌 사실을 자신에게 가르쳐주듯 그리 큰 위력도 없는 옥음지를 사용했다.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런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고 옥음지를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흉수로 몰릴 터인데 오히려 감추어야 정상이 아닌가? 설중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도 자인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뭔가 일이 꼬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풍철한이 다시 경후에게 물었다.

"능효봉은 그 방에 있었소?"

"그렇소. 침상에서 자고 있었소. 약간의 실랑이 끝에 이곳에 와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오."

지금까지 신태감의 시신과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보며 말이 없던 함곡이 불쑥 물었다.

"상처가 심한데 욕조는 왜 가져다 놓은 것이오?"

상식적으로 맞지 않은 일이었다. 상처가 나지 않은 타박상이나 멍이 들었다면 따뜻한 물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허나 상처가 심한 사람이 목욕을 하려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태감의 몸에 흐른 피가 낭자한 것을 보고 닦아내려고 본관이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시켰소. 그것을 시녀들이 잘못 알아듣고는 욕조를 준비했던 것이오."

대답을 하던 경후도 무언가 이상한 듯 다시 시선을 돌려 욕조 안에 들어가 있는 신태감을 보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온몸에 상처가 심한 신태감이 욕조에는 왜 들어간 것일까? 더구나 뜨거운 물이었다면 아예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조의 물은 어느 정도 뜨거웠고, 얼마만큼 채운 것이오?"

"그것은 본관도 모르오. 시녀들이 빈 욕조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따뜻한 물을 채우라고 하고는 서당두 방으로 갔기 때문에…."

그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갑자기 풍철한이 반효를 보며 말했다.

"야. 저 녀석하고 서당두 방에 가 능효봉이 있는지 확인해. 만약 아직 있으면 오라고 하고…."

저 녀석이란 설중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갑작스런 말에 반효는 눈을 꿈뻑이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설중행에게 턱짓을 했다. 풍철한의 말대로 같이 가지는 뜻이다. 그들이 방문을 나서려 하자 풍철한이 다시 소리쳤다.

"이 방에 욕조를 가져다 놓은 시녀들도 와보라고 해."

그 말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좌등이 방문으로 상체를 들이밀며 대답했다.

"준비를 시켰소. 잠시 후면 이 방으로 올 것이오."

좌등의 대답에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이며 좌등을 불렀다.

"좌선배께서도 잠시 들어와 보시겠소?"

어제 다툼으로 두 사람 간에는 왠지 서먹서먹한 느낌이 있었다. 허나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었고, 앙금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해지고는 싶은데 선뜻 손을 내밀기 쑥스러운 마음이었다.

"분부가 있으시오?"

좌등이 다가오며 물었다.

"분부라니…, 감히 소제가 좌선배께 분부를 내릴 수 있겠소? 좌선배께서 그러시니 부탁하기도 어렵구려."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네는 풍철한을 보며 좌등 역시 따라 웃었다. 사내의 웃음이란 어떤 때에는 여인의 교소보다 보기 좋을 때가 있다. 좌등은 풍철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씀만 하시오."

혼 쾌히 대답하는 좌등을 보며 풍철한은 정말 사귀어 볼만 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혹시 전에도 운중보 내에서 구룡의 무공이 나타난 적이 있었소?"

"……!"

좌등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싶었다. 그것은 어쩌면 풍철한의 추측대로 전에도 운중보 내에 구룡의 무공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했다.

"아니면 혹시 구룡의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있는지…."

풍철한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좌등 같은 인물이 선뜻 대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다가 좌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것에 대한 것은 노부보다 보주나 귀산(鬼算) 어른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오. 듣기는 하였으나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르오. 보주께 물어보기 어렵다면 귀산 어른에게 묻는 게 나으실 거요."

"귀산노인……."

풍철한은 나직하게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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