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속에 살다 간 신라인 혜초의 삶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5] 선유사 혜초 기념비를 찾아

등록 2006.11.06 11:45수정 2006.11.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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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주지현 가는 길

주지현 가는 길 ⓒ 오창학

아침이 분주하다.

오늘도 시안에 머물 예정지만 혜초 기념비가 있는 선유사(仙遊寺)를 찾아내고 건릉·무릉까지 돌아보는 것으로 빡빡한 계획을 세운 까닭이다. 특히나 선유사에 대한 정보라고는 시안시 외곽의 주지현(周至縣:저우즈센)에 있다는 것, 지금은 댐이 생겨 근처로 옮겨져 있다는 사실 뿐이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리란 예측이 어렵다.


전날 지도를 꼼꼼히 살펴 시안 서북 방향 80여km 지점에 주지현이 있음은 확인했으나 주변에 수소문해도 선유사의 존재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으론 98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유명세를 탄 곳이고 백거이의 <장한가>가 탄생한 역사적 현장인데 이토록 정보가 어두울까. 그렇다면 일단 출발 후 주지현에 가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주지현 남쪽 십수 km떨어진 흑수곡(黑水谷), 위수 건너편으로 양귀비가 죽었다는 마외역(馬嵬驛)이 멀리 건너 보이는 장소, 현재 진펀(金盆)댐이 있는 곳. 이 정도 단서면 설마 가서 헛걸음이야 할까.

시안 서쪽으로 310번 도로에 오른 후 이정표 따라 70여km를 가니 주지현이 나온다. 현성을 돌아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 방향으로 진행, 몇 km 가지 않아 진령(秦嶺)산맥이 보인다. 저 진령을 넘으면 쓰촨성으로 들어간다는 말인데 어디쯤이 선유사일까 하는 사이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왼쪽 먼 언덕에 탑이 하나 보인다.

"저거다!"

옛 선유사 있던 곳에서 옮겨온 법왕탑(法王塔)이 틀림없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수나라 전탑이기도 하거니와 탑의 해체과정에서 진신사리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혜초를 찾아가는 길


a 선유사 전경.

선유사 전경. ⓒ 오창학

옛 선유사의 맞은편 언덕으로 옮겨진 법왕탑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콘크리트로 지어진 새 선유사는 절집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스님도 보이지 않고 불상도 찾을 길 없는, 절집이라는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전혀 알아보지 못할 유형의 건물이다. 짓다 만 건물구획에 백거이 <장한가>가 새겨진 돌판이 죽 기대어 있다. 선유사가 백거이 <장한가>의 탄생지임을 새삼 각인시킨다.

한 무리의(그래봐야 달랑 6명이지만) 이방인들이 들이닥치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모여든다. 여러 차례 답사 끝에 변인석 교수가 혜초 기념비도 건립해 놓았고 작년 실크로드를 답사한 정수일 교수도 들렀던 곳인데 여전히 외국인은 익숙지 않은 존재인가보다. 건물 안쪽 2층의 선유사 문물전시관을 유료로 관람하고 곧장 뒤편 언덕의 혜초기념비를 찾아 올랐다.


a 강렬한 햇살을 막으며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오르는 교수님

강렬한 햇살을 막으며 기념비가 있는 언덕에 오르는 교수님 ⓒ 오창학

햇살이 작렬하는 까닭에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단지 햇살 때문만은 아니고 이곳에 닿고자 했던 그리움이 그 짧은 시간도 길게 여겼으리라. 황인덕 교수님도 허위적 허위적 길에 오르신다. 관심사 앞에서 세사를 잊고 몰두하는 그 열정이 부럽다.

a 혜초 기념비 전경. 누각 안의 비가 혜초기념비고 우측의 것은  일본인 서예가를 기리는 비.

혜초 기념비 전경. 누각 안의 비가 혜초기념비고 우측의 것은 일본인 서예가를 기리는 비. ⓒ 오창학

땀이 송글송글 맺히려는 즈음 기념비 누각이 저만치에 보인다. 1998년에 이곳을 답사했던 변인석 교수의 주도로 2001년에 '신라국혜초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분이 아니었던들 혜초 스님이 기우제를 지냈던 선유사 옥녀담 거북바위의 흔적이 그대로 수몰될 뻔 했다.

기념비는 수몰된 옛 선유사 자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에 있다. 비 앞에는 '혜초기우제평'이라 새긴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기우제를 올렸던 옥녀담 거북바위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다. 혜초 기념비 우측으로 당 대 일본 서예가의 비석도 세워져 있다.

a 혜초기념비와 옥녀담 거북 바위의 일부

혜초기념비와 옥녀담 거북 바위의 일부 ⓒ 오창학

8세기의 일본승려 엔닌(圓仁)의 기록에 따르면 장안에 가뭄이 극심할 땐 왕의 공덕사가 각 절을 돌며 기도를 독려하고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승려들이 들볶였다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치루는 기우제 의식은 범국가적 행사였다.

774년. 국가적 가뭄의 위기에 대종(代宗)은 장안의 고승·대덕 중 혜초를 지명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한다. 이때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지어 올리며 기우제를 주관한 장소가 여기 흑하(黑河)의 선유사 옥녀담이었다.

a 옛 선유사 자리(위)와 물에 잠긴 지금의 모습(아래)

옛 선유사 자리(위)와 물에 잠긴 지금의 모습(아래) ⓒ 오창학

지금은 그 옛날 옥녀담이 진펀댐 큰 물 아래 잠겨 있다. 어떤 것은 가질 수 없기에 더 그립고 아련하다. 수몰되기 이전의 사진을 들고 전경을 조망하니 옛 흔적이 어디였는지가 확연히 보인다. 모두들 어떤 생각을 하며 이 풍경을 보고 있을까. 1300여 년 세월의 무상함일까, 물길을 덮은 또 다른 물 같은 산천의 변화일까.

a 옛 터를 확인하는 일행

옛 터를 확인하는 일행 ⓒ 오창학

그가 올린 표문에 의하면 혜초가 옥녀담에서 제단을 세우고 향을 피우자 산천이 영응하여 계곡에서 소리가 나는지라 사리를 던졌더니 비단결 같은 보슬비가 흡족히 내렸다 한다. 혜초는 이를 가리켜 미물의 작은 정성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성은에 감동했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당에서 명성을 떨친 고승 대덕이 어디 한 둘인가. 왜 꼭 혜초인가. 서역으로 향하는 길에 나선 우리로선 먼저 걸었던 그의 행적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나 현장(玄裝)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보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바닷길로 인도에 들어가 육로를 통해 당으로 돌아온 여정이므로 다루고 있는 정보가 예전과 다르고 8세기 초반의 중앙아시아 정보를 소상히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특별하다.

a 혜초 기념비

혜초 기념비 ⓒ 오창학

기념비가 있는 누각에선 남녀 동네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바람 드는 언덕에 따가운 햇살을 막아줄 누각, 어른들의 눈을 피해 청소년이 쉬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는 그들을 훑고 구경한다. 건립 이후 겨우 몇 년이 지난 기념비는 낙서와 긁힘이 심하다. '중화'속에 살다 간 신라인 혜초의 삶도 이 생채기 입은 비석의 삶 같았을까? 천축국 순례를 마치지 않았어도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지는 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a 싸고 맛있고 양 많았던 아랫마을 식당과 허리띠 면

싸고 맛있고 양 많았던 아랫마을 식당과 허리띠 면 ⓒ 오창학

기념비에서 한참 뜸을 들인 후 선유사 아랫마을 식당을 찾았다. 일종의 '안동찜닭'인 따판지를 시켰는데 면이 넓은 허리띠 같다. 음식 그릇 큰 것과 더불어 넓은 면은 산시성의 특성이다. 모두 산시성 물산이 풍부함을 방증하는 것들인데 오죽하면 산시성 여자는 다른 성으론 시집을 안 가려 한단 말이 있을까. 허름한 시골 음식점치고 음식 맛이 좋고 양도 흡족해서 식당 사진을 찍어두었다. 누군가 선유사를 찾는 한국인이 있다면 여기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도 좋겠다.

a 오토바이로 중국을 가로 질러 여행 중이던 젊은이들.

오토바이로 중국을 가로 질러 여행 중이던 젊은이들. ⓒ 오창학

식당 앞에서 중국을 30일째 오토바이로 여행 중인 미국인 셋을 만났다. 상해까지 이렇게 가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갈 계획이란다. 셋 다 중국산 125cc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들. 차로 움직이는 우리보다 더 고생을 하며 이곳까지 왔을 게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에 대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선유사를 뒤로하고 나오는 차 안에서 우린 내내 베엠베(BMW)크루즈와 할리데이비슨에 대해 떠들었다. 다음 여행은 사륜구동 말고 할리데이비슨 같은 거 타고 한 번 해보자는 둥, 그런 용도로는 베엠베가 낫다는 둥. 언제는 남자의 로망이 사륜구동이라더니 내 입은 간사하게 오토바이를 말한다. 할리의 크랭크축에 걸린 두 개의 피스톤에서 나오는 엇박자의 둥둥거림을 듣고도 가슴이 뛰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김광석, 그 친구가 떠오른다. 군 시절 유럽 여행을 상상할 때마다 부른 노래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지금도 이 노래는 내 여행 주제가다. 그가 이 노랠 소개하며 나이 마흔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해 보고 싶다 했다. 그런데 164cm의 단신이라 오토바이 위에서 다리가 닿을까 싶어 충무로 매장엘 나가봤다지. 다행히 다리는 닿는데 몸무게가 안 되더라는, 그래서 마흔까지 몸 만들어 세계를 돌아보고 싶다던 그는 이제 다른 세상에 있다.

교수님도 덩달아 오토바이 농담에 동참하신다. "나도 한 번 해볼까. 가죽 장화 신고, 체인 막 감고." 배가 당기도록 웃었다. 허위적 허위적 도포자락 날리듯 걸으시는, 노상 문어투 어법이 생활에 배인 고전문학 교수님이 할리를 타고 세계를 돌아본다? 체인 막 감고…?

웃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백면서생인 나도 사륜구동에 짐 꾸려 대륙에 나설 계획을 세웠고, 지금은 이렇게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냐고. 혜초의 선유사와 할리데이비슨, 그 멀고도 가까운 것들 사이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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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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