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살림꾼 봄이 엄마, 문화유산해설사로 데뷔하다

아름다운 중년을 위해 씨 뿌리고 터 닦는 아줌마

등록 2006.11.07 15:43수정 2006.11.0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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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강화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태워다 주기 위해 급하게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아침 7시 50분까지 학교에 도착해야 하는데 오늘은 조금 늦었다. 간당간당하게 시간에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급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집을 나서서 막 속도를 올리는 참인데 손 전화에 메시지가 들어왔다. 봄이 엄마가 보낸 메시지였다.

"성님 북산에 올라 가을바람 함 받아봅시다 연락주삼"

나는 잠시 생각해 봤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과 하고자 했던 일들이 뭐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봤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까 목이 뻑뻑한 거 같아서 한의원 가려고 의료보험증 챙겨왔는데, 병원부터 먼저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좋은 날에,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회를 그냥 놓쳐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자란 잠을 자느라 꾸벅대고 있는 아들에게 답문자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은 내가 불러주는 대로 답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강화군립도서관에서 만났다. 오전 9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서 도서관 마당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잔 씩 빼서 마시며 오늘의 일정을 이야기 나눴다.


오늘 우리는 강화 읍내를 감싸고 있는 산 중에서 북쪽에 있는 북산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산이래 봤자 나지막한 야산이라서 한 바퀴 다 돌아봐야 한 시간도 채 안 걸릴 거리였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전문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들을 살펴보니까 새로워 보였어요. (고려궁지입니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전문 설명을 들으면서 유적들을 살펴보니까 새로워 보였어요. (고려궁지입니다.)이승숙
북산으로 가는 길목엔 '고려궁지'가 있다. '고려궁지'는 이름 그대로 고려궁 터라는 뜻이다. 고려 시대 때 강화는 39년간 수도 아닌 수도 역할을 했다. 몽고군을 피해서 개경의 고관대작들이 다 강화로 피난 와서 39년간 지냈다. 그때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고려궁지'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고려궁지에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관람객이 없었다. 강화에 사는데도 고려궁지에 가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래서 이참에 고려궁지도 둘러보고 가자고 의견을 맞췄다.

고려궁지로 들어서는 계단을 막 밟는 참이었다.

"성님, 가운데로 가면 안 돼요. 가운데 계단은 임금님 전용 계단이에요."

무심코 발을 올려놓는 우리에게 봄이 엄마가 주의를 주는 거였다.

"그래? 그럼 일반 백성들은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는 거야?"
"자, 보세요. 여기 문이 세 개 있죠? 가운데 문으로는 임금님만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동입서출이라고 백성들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서쪽 문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야, 봄이 엄마 오늘 데뷔하네. 그래 좋아, 프로 살림꾼 이애경 여사 문화유산해설사로 오늘 데뷔하는 거야."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계단을 오르던 우리는 봄이 엄마 말에 다시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봄이 엄마 이애경(42)씨는 올해 7월부터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하고 있다. 강화군 문화관광과에서 실시하는 문화유산해설사 과정에 지원해서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는 중이다. 해설사 과정은 7월부터 11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배움의 깊이와 넓이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했다.

봄이 엄마와 알고 지낸 지는 햇수로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 만났을 때의 봄이 엄마 인상은 한 마디로 '서울깍쟁이' 같았다. 빈틈없고 야무지게, 손해 안 보고 살 사람처럼 보였다. 과연 첫인상 그대로 봄이 엄마는 깍쟁이다. 하지만 내 것만 챙기는 미운 깍쟁이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다 챙겨주고 거둬주는 예쁜 깍쟁이다.

그냥 들렀는데도 이렇게 정갈한 찻상을 차려 줍니다.
그냥 들렀는데도 이렇게 정갈한 찻상을 차려 줍니다.이승숙
봄이 엄마는 진짜배기 살림꾼이다. 살림 사는 재주가 얼마나 좋은지 나이 더 먹은 우리도 봄이 엄마에게 배울 때가 참 많다. 봄이네 집에 가면 어느 한구석 주부인 봄이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 특별하게 호사스럽게 꾸며놓고 살진 않지만 가구며 집기류에서 봄이 엄마의 알뜰함과 세심함이 엿보인다.

어쩌다 한 번씩 봄이네 집에 놀러 가서 밥을 같이 먹을 때면 그 집 살림살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음식을 담을 때도 신경을 써서 딱 그 음식에 맞는 그릇에 담아낸다. 그러니 식탁에 앉으면 눈으로 벌써 행복하고 나중엔 배불러서 또 한 번 행복감에 젖게 된다.

그녀는 또 아이들과 남편도 알밤같이 거둔다. 두 딸들은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서 구김이 없고 남편은 마누라의 든든한 내조 덕분에 승승장구한다.

나는 어떤 때 생각해 본다. 나중에 우리 아들의 배우자로 봄이 엄마 같은 사람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살림 야무지게 잘 살고, 식구들을 내 품 안에 감싸 안고 따뜻하게 먹이고 입혀주니, 내 아들이 봄이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면 호강하면서 살 거 같아 은근히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애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엄마 손이 덜 가도 되는 나이가 되자 봄이 엄마는 자기 개발로 들어갔다.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서 만학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리고 또 문화유산해설사 공부를 하고 있는 거다.

고려궁지에 같이 갔던 정우 엄마와 나는 봄이 엄마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저기 저 기와 지붕 위에 풀 보이죠? 저걸 와송이라고 불러요."
"와송? 기와 와 자에 소나무 송 자인가 보다. 그럼 기와 소나무란 말인가?"
"아이구 성님은 맨날 한문을 국문으로 풀이하더라."
"아냐 봄이야, 어려운 한자말보다는 쉬운 우리말로 풀이해 주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잖아. 자기 진짜 해설사 되면 그리 해줘라. 우리말로 풀어서 해 줘라."


봄이 엄마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있죠, 프로 해설사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거 같아요. 어중간하게 해서는 안 될 거 같아요."

봄이 엄마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그리 말했다.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봄이야, 좋아서 하면 다 프로가 되잖아. 내가 좋아서 하는데 어찌 프로가 안 되겠어? 빠져서 열심히 하는데 저절로 프로가 될 거야. 자기, 오늘 보니까 너무 잘 한다. 앞으로는 배운 거를 내 것으로 소화시켜서 풀어내기만 하면 되겠다. 배운 거를 그대로 복기하지 말고 말이야."

봄이 엄마의 설명을 들으면서 전등사를 안고 있는 삼랑성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봄이 엄마의 설명을 들으면서 전등사를 안고 있는 삼랑성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이승숙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고려궁지 뒷산인 북산에 이르렀다. 북산에는 산을 에워싸고 산성이 빙 둘러져 있다. 그곳에서도 봄이 엄마는 배운 것을 이야기해 준다. 그냥 오르기에 별 무리가 없는 야트막한 산길이지만 그래도 말을 하면서 오르기엔 조금 힘든 길이었다.

"봄이야, 하루종일 이렇게 설명해 주고 그러면 힘들겠다. 그런데 하루 일당이 너무 적은 거 같다."

문화유산해설사의 하루 일당은 3만원으로 책정되어 있단다. 그것도 매일 일이 있는 거도 아니고 또 일이 있다고 해서 매일 할 수도 없다 했다. 매일 하면 너무 힘들거란다.

"성님, 돈 보고 하나요 뭐? 일부러 놀러다니는데 경치 좋고 배울 것 많은 유적지에서 일하니 얼마나 좋아요. 난 그냥 한 달에 열흘 정도만 일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30만원만해도 많지 뭐."
"그래 맞아. 돈 보고 하면 안 될 거야. 내가 좋아서 해야 일이 재미있지 돈 보고 일하면 피곤할 거야."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북산을 내려와서 내친김에 가을 들판 길을 걸어보자고 입을 맞췄다. 그래서 송해면으로 넘어갔다.

가는 길에 들른 정우네 집 화단에는 오밀조밀하게 야생화 화단이 꾸며져 있었다. 나는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데 봄이 엄마가 약탕관을 들어서 물을 따라 버리는 거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작은 항아리의 물도 따라 버리는 거였다. 정우 엄마가 물었다.

"물은 왜 따라버려요?"
"응, 이런데 물이 고여 있으면 물벌레 생기잖아. 물 담아두지 말고 그냥 엎어둬. 그럼 물벌레 안 생겨."


봄이 엄마가 그리 말하면서 약탕관과 항아리를 엎어 두었다. 그냥 지나쳐 버리는 작은 것도 세심하게 챙기는 작은 마음이 보였다. 깍쟁이 같은 외모 속에는 그런 속 깊은 마음이 숨어 있었다.

봄이 엄마의 공부 공책.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근조근 말해주듯이 설명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봄이 엄마의 공부 공책. 옆에 있는 사람에게 조근조근 말해주듯이 설명들을 적어 놓았습니다.이승숙
어제는 봄이 엄마랑 참숯가마에 갔다. 봄이 엄마는 지난 사흘간 새벽에 일어나서 서울 뚝섬까지 가서 방송통신대 출석 수업하고 왔단다. 새벽에 갔다가 밤에 돌아오니까 너무 힘들었다며 숯가마에 가서 좀 지지고 싶다 그랬다. 그래서 둘이서 숯가마에 간 참이었다.

봄이 엄마가 가방에서 뭘 주섬주섬 꺼냈다. 노란 귤 몇 개와 물 한 병, 그리고 자그마한 공책 한 권을 가방에서 꺼냈다. 공책의 옆구리에는 가지각색의 분류표가 붙어 있었다.

"내일(11월 6일)부터 현장 나가서 실습해야 하는데 이거 공부 더 해야 해요. 서울 나가느라 공부를 잘못한 거 같아 마음에 걸리네요."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해설사로 나가야 하는데 자기는 방송통신대 출석 수업 때문에 며칠 공부를 못해서 불안하다며 공부할 내용을 훑어보는 거였다.

빈틈없이 야무지게 자기 일 잘하고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도 챙겨주는 봄이 엄마 이애경씨, 그녀가 40대를 준비하며 힘차게 나가신다. 집안 구석구석을 알토란 같이 가꾸던 그 솜씨로 중년의 힘찬 고개를 거뜬히 넘어가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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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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