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9회

등록 2006.11.10 08:10수정 2006.11.10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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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잠깐이었지만 가슴에 아련한 통증도 밀려들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느낌일까?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암연(黯然)같은 빛줄기가 여린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았다.

푸스스스----


천장에서 뒤늦게 살기가 폭사됨과 동시에 미세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아마 상만천이 딸들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놓은 호위들인 모양이었다. 움직이려다 설중행의 경고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터였다. 그 모습에 풍철한은 내심 미소를 흘렸다.

(자식들…, 눈치는 꽤 빠르군. 손발도 척척 맞고…. 하지만 일을 너무 크게 벌려놨어.)

아니나 다를까? 보다 못한 좌등이 나섰다. 이미 일은 크게 터졌다. 더는 사태가 악화하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빚어질지 모른다.

"이제 그만들 두시오. 두 분은 그만 물러서시고, 소저들은 어서 거처로 돌아가시오."

너무나 황당한 일을 당한 상교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독기어린 눈빛으로 능효봉을 쏘아보았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더구나 자신의 뺨을 갈길 사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던 그녀는 좌등의 말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바로 이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개를 홱 돌리며 좌등을 보았다.


"좌어른께서는 지금 소녀가 이 따위 자식에게…."

아마 뒷말은 뺨을 맞고 그냥 돌아가라는 말이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말은 두 가지 이유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하나는 그녀가 더 말을 하지 않고 급작스럽게 바로 능효봉을 차았기 때문이었다.


붉은 화복 사이로 그녀의 고르게 뻗은 다리가 희끗 보인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그녀의 작은 발은 능효봉의 사타구니에 닿고 있었다. 그녀의 희고 쭉 뻗은 다리를 감상할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아마 저 작은 발에 사타구니를 차이기라도 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앞으로 다시는 여자 근처에도 못 갈 일이었다.

쨕--!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또다시 그녀의 뺨에 작렬하는 능효봉의 손 때문이었다. 그녀의 발이 사타구니를 차오는 순간, 아니 그녀의 입에서 '이 따위 자식'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이미 그의 왼손은 상교교의 오른 뺨을 갈기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주 자연스럽게 오른발을 들어 무릎을 굽히며 가로로 세우자 정강이뼈끼리 부닥치게 되었고, 그녀는 얼굴이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비틀린 자세로 나동그라지며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명은 나중에 들렸다.

"악---!"

그때였다. 죽은 두 남녀가 벌거벗은 채 포개져 있는 침상 천장 쪽에서 두 개의 흑영이 쾌속하게 능효봉을 향해 내리꽂혔다.

쇄애액----!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설중행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렀다. 동시에 그가 움직이려는 순간 능효봉을 향해 내리꽂히던 두 개의 흑영이 갑자기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설중행을 공격해왔다. 그들 역시 능효봉을 공격해 왔지만 자신들이 몸을 나타내는 순간 설중행이 먼저 움직일 것이라 예측했던 모양이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은 평범한 호위무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의 공격은 매우 날카로웠고, 빨랐다.

스으---사사삭----!

하나는 설중행의 정수리를 향해 꽂혔고, 또 하나는 그의 좌측 어깨 쪽으로 파고들었다. 두 공격을 모두 피하려면 우측으로 도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 공격을 해올 때에는 함부로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손목을 놀려 움직이는 칼날보다 신형이 빠를 수는 없다.

"……!"

설중행의 눈에 긴장감이 떠오르며 왼팔을 들어 어깨로 쏘아 드는 검날을 팔뚝으로 막으면서 그 탄력으로 상체를 뒤로 활처럼 젖혔다.

까강---!

옷소매에 감춰진 소도가 쏘아오는 검날과 부닥치며 경쾌한 금속성이 터졌다. 동시에 설중행의 몸은 발 하나만으로 몸을 지탱한 채 지면과 수평으로 몸을 돌렸다. 동시에 오른발이 정수리를 노리고 내리꽂히던 인물의 검배를 차내며 연속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옆구리를 차갔다.

파파파팍----!

그의 발놀림은 너무나 간결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정수리를 노리며 쏘아오던 사내는 예상치 못한 설중행의 반응에 놀란 듯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급히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헛…!"

허나 설중행의 공격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내는 한 바퀴 몸을 회전시키면서 지면에 내려섰는데 설중행의 마지막 발차기에서 옆구리가 스치며 불안정하게 두세 걸음 밀려났던 것이다. 그래도 빠른 대응으로 정확한 타격을 피할 수 있어 낭패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소림의 무상각이라…. 자식…, 분명 무상각인데 군더더기는 빼고 실전적으로 익혔군."

풍철한이 다소 감탄이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무릇 초식에는 상대의 눈을 속이기 위한 허초(虛招)가 섞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설중행의 각법에는 허초가 없었다. 대신 빠르고 간결했다. 확실히 설중행은 하수가 아니었다. 무상각 같은 절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인물이 하수일 리 없었다. 그것을 피한 두 사내도 만만치는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풍철한이나 그 주위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설중행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아주 흥미롭게 그들의 접전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능효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싸움이었음에도 그는 마치 불구경하듯 느긋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설중행을 믿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좌측의 사내가 설중행이 몸을 일으키기 전에 하체를 쓸어왔다. 그의 공격은 다소 광폭한 느낌이 들었는데 설중행이 피할 것을 예상했는지 갑자기 검날을 뒤집으면서 연속적으로 세 번을 찔러왔다.

동시에 낭패를 모면한 사내 역시 안정을 되찾은 듯 빠르게 신형을 날리며 설중행의 머리 위를 타고 올랐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인물들로 보였다. 첫 번째 사내의 공격에 맞춰 퇴로를 막는 것이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공수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설중행의 안색이 변하며 움직임이 급박하게 변했다. 확실히 상대들은 쉽게 처리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아니 하나라면 몰라도 둘의 합공은 상대하기 벅차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경우 속전속결이 우선이었다. 일단 한 명부터 빠르게 제압해 나가야 곤경에 빠지지 않을 터였다.

그는 양팔을 기묘한 각도로 꺾으며 쾌속하게 놀리기 시작했다. 팔목을 꺾고, 돌리는가 싶으면 베어 가듯 휘둘렀다. 그의 양 소매에 메어진 소도로 인하여 팔의 움직임은 많은 제약이 따랐지만 바로 소도의 움직임이어서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까강-- 츠으측--

검날과 소도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팔로 막는 것 같지만 교묘하게도 팔목에 대어진 소도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뒤로 밀리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단병의 효용을 발휘하려면 상대와 되도록 근접해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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