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3회

등록 2006.11.16 08:12수정 2006.11.16 08:12
0
원고료로 응원
허나 함곡은 비밀통로를 나오면서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상황은 살펴보면 이미 계획된 살인이었다. 그리고 흉수는 능효봉의 말대로 인내심이 매우 깊은 자였다. 절대 충동적인 살인이 아니었다. 더구나 윤석진은 철담의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공교롭게도 이런 시기에 살해된 것은 아무리 돌발적인 사건이라 보여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중행까지 모두 방으로 나오자 함곡이 좌등에게 물었다.


"좌선배께서는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소?"

"본보에서는 식솔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편이오.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모든 것을 간섭하게 된다면 답답해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오. 자신의 거처를 어떻게 바꾸든, 누구를 만나든 간섭하지 않소."

"이 여자와 가까웠던 사내가 있소?"

"과거 쇄금도가 떠나기 전 공공연히 두 사람 간의 혼담 말이 떠돌았던 것으로 기억하오. 하지만 쇄금도가 떠난 이후로 저 여자에 대한 소문은 없었소."

"혹시 천리향을 쓰는 사람이 있소? 특히 사내 중에 말이오."


함곡은 여인의 노리개나 화장도구가 있는 탁자 위를 살피며 물었다. 만약 죽은 가려란 여인이 천리향을 사용하는 여자라면 문제는 간단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천리향은 맡아지지 않았다.

"사향(麝香)이야 가끔 사내들도 허리춤에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천리향 같은 향은 여인네들이나 사용하는 것 아니오? 여자들 중에는 아마 몇 될 거요."


복이 떨어진다고 목욕이나 빨래를 자주 하지 않는 습관으로 남자들도 때로는 사향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또 실내에서는 향을 피워 냄새를 없애기도 했지만 천리향 같은 것을 사용하는 사내는 거의 없었다.

"천리향을 쓰는 사람이 누군지 은밀하게 알아봐 주시겠소?"

"그거야 어렵지 않소. 아…!"

좌등이 대답을 하다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눈빛을 빛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사내 중에 은은하게 천리향을 풍기는 사람이 있소."

"누구요?"

"보주의 다섯째 제자인 미환검(美幻劍)이오."

함곡과 풍철한의 뇌리에 여장이라도 시켜놓는다면 계집처럼 보일 정도로 곱게 생긴 사내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던 큰 눈망울과 사내의 목소리답지 않게 조용하고 여린 목소리를 가진 인물로 오늘 아침 신태감의 처소에서도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은은하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향기가 풍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밀 통로로 드나든 사내가 추교학(萩矯學)이었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듣고 있던 설중행은 하마터면 궁수유 역시 서향을 사용한다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목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키고는 자신이 알아보리라는 생각을 굳혔다.

"일단 단서 하나는 잡은 셈이군."

풍철한의 말에 지금껏 궁금함을 누르고 있던 좌등이 물었다.

"단서라니 무슨 말이오? 천리향하고 관계가 있소?"

풍철한이 족자를 가리켰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저 안에서 천리향이 남아 있소. 일단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든 없든 간에 뭔가 연결고리는 있을 것 같소."

대답하는 풍철한의 얼굴에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건은 자꾸 터지고 있었다. 정작 연결고리는 이런 사소한 한 사건의 것이 아니라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연결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중보를 자세히 알아야 했다.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윤석진이 말한 대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야 했다.

41

호조수(虎爪手) 곽정흠(郭晸歆)을 불러 방을 붙이고 손님들에게 직접 전하라고까지 지시한 좌등은 아침도 거른 상태였다. 함곡이 말한 대로 방은 어젯밤 해시(亥時)부터 자시(子時)까지 첩인장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으면 고하라는 것이었고, 또한 첩인장이 아니더라도 현재 중상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식사 중이셨구려."

운중보의 다른 전각과는 달리 초라해 보일 정도로 흙벽돌을 쌓아 만든 모옥(茅屋) 안은 의외로 넓은 편이었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네. 그러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밥만 축내게 되지."

귀산 노인이었다. 대개 아침으로는 교자(만두)를 먹는 것이 보통인데 밥을 먹고 있었다. 반찬은 두세 가지뿐이었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콩깍지를 볶은 것과 배추를 절여 볶은 것 같은 채소였다. 하지만 맛있게 먹고 있었고, 이미 밥그릇은 거의 비어 있었다.

"식사는 했나?"

"아직 못했소."

"같이 들자고 하지도 못하겠군. 차나 같이 들세."

말과 함께 귀산노인은 젓가락을 빈 그릇에 담아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한 허리를 힘겹게 펴고는 탁자 위의 식기들을 한쪽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좌등을 따라 들어온 인물들이 아직 어정쩡하게 서 있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볼품은 없는 곳이지만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 편한 대로 앉아. 원 사람들이 잔뜩 긴장해 갖고는 전쟁하러 나가는 사람들 같구먼."

갑자기 많은 인물들이 들이닥치자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은 아니었다. 사실 이른 새벽에 이렇게 불쑥 사람들을 몰고 찾아온 것은 아무리 좌등이라 해도 실례되는 일이었다. 귀산노인이 아무리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성격이라고 해도 외부인들을 데리고 오려면 적어도 일각 전 정도는 전갈을 주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수전(文秀佺)입니다. 어르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호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어른에 대한 대접을 하겠다는 의미와 함께 실례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었다. 함곡이 공손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자 찻물을 우리던 귀산노인이 동작을 멈추고는 마주 인사를 했다.

"말은 뭐…?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산송장에 대해 들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오히려 노부가 영광이라네. 살아생전 함곡선생을 마주 대하게 되니 말이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네."

이래서 사람은 이름이 나야 하는가 보다. 지금까지 퉁명스럽게 대하던 귀산노인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다. 게다가 함곡의 앞으로 제일 먼저 찻잔을 놓고는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이미 일행이 들어왔을 때부터 함곡을 알아보았을 터인데도 시침을 뚝 떼다가 인사를 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로하신데 아직까지 모든 것을 손수 하십니까?"

차를 받으면서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운중보주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그에게 시비 하나 딸리지 않은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이게 편해. 수족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럴 셈이네."

대충 자리를 잡은 인물들을 훑어보더니 귀산노인은 옹기처럼 생긴 찻잔을 늘어놓고 찻물을 따랐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