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대기업 상무에서 행복한 요리사로

경남 마산시 '요꼬쬬'의 요리사 박의흠씨

등록 2006.11.21 12:16수정 2006.11.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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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상무에서 행복한 요리사가 된 박의흠씨.
대기업 상무에서 행복한 요리사가 된 박의흠씨.김연옥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새로 태어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늦은 나이에 여태껏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걸어가며 또 다른 세계에 눈이 트이는 설렘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대기업의 상무이사로 재직하다 요리사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박의흠(56)씨. 그가 '요꼬쬬'의 행복한 요리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요꼬쬬'는 우리말로 골목길을 뜻한다. '골목길'이란 이름이 정겨워 그걸 할까도 생각했지만 부담 없는 가격으로 일본 음식과 복요리를 즐길 수 있는 집이란 느낌이 쉽게 전해지는 것 같아 음식점 이름을 '요꼬쬬'로 정했다고 한다.

내가 그곳을 처음 찾은 날, 골목 안에 있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음식점 간판이 오히려 마음을 끌었다. 왠지 '요꼬쬬'의 요리사 박의흠씨의 은근한 배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실한 엔지니어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다

부산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박의흠씨는 1976년 8월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하면서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한곳에 자리 잡고 편안히 안주하는 것이 싫었다 한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따라 서울, 충남 보령과 천안시 등 대우 계열회사의 여기저기로 계속 옮겨 다니게 되었다.


그는 자동차용 변속기 개발에 특히 관심이 많아 지게차와 경차(티코)용 변속기의 국산화, 상용차용 변속기 개발과 승용차용 자동 변속기의 국산화 등에 힘을 쏟았다.

지난 1999년에는 (주)고려 폴란드공장에 이사로 부임하게 되어 2년 동안 해외 근무를 하다 2001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자동차 시트용 부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주)윤영에서 상무이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그가 2003년 12월 31일에 이메일을 통해 회사에 사직서를 내게 되었다. 회사에 가서 직접 사직서를 제출할 경우 상사와 동료들의 만류로 혹시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메일로 사의(辭意)를 밝혔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체력이 따라 줄 때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결국 요리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요리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는 꿈을 더욱더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직장 관계로 마산에 살고 있던 가족과 한동안 떨어져 있었다. 알콩달콩 살지는 못해도 가족이 정작 그가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할 때마다 곧장 달려가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의 아내 김옥인(52)씨가 난소암이란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고 아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밤이 되면 창으로 비쳐 드는 교교한 달빛을 바라보며 혼자서 외롭게 죽음이란 두려움과 싸워야 했다. 바쁘게 살다 왜 큰 병을 앓고서야 뒤늦게 걸어온 삶을 돌아다보게 되는 건지, 그녀도 몹시 아프고 나서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김옥인씨는 "어쩌면 제가 큰 병을 앓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사직에다 낯선 분야로 나가겠다는 아버지의 결정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아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그때 아들한테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사는 건 슬픈 일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대학생 아들을 위해 밥을 짓고 요리사 준비를 하다

사직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서울로 올라간 박의흠씨는 그 당시 서울대학교 약대를 다니고 있던 아들을 위해 2년 동안 손수 밥을 지어 주며 같이 생활을 했다. 그리고 요리 학원에 등록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복어조리기능사와 일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그는 경험을 쌓기 위해 독산역 근처 한 횟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밤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하는 조건으로 설거지부터 시작하여 생선회를 뜨는 일에 이르기까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많은 걸 배웠다.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았지만 첫 손님 상에 오를 생선회를 준비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회를 뜨면서 아무리 닦아 가며 조심조심해도 자꾸 피가 나와 이상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 손가락에서 피가 계속 흐르고 있더라는 거다. 그래도 잔뜩 긴장이 되어 아프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날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만 나온다고 했다.

올 3월은 그들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었다. 모처럼 오붓하게 세 식구가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 청담동에서 꽤 이름난 복요리전문점 주방장의 지도도 받으며 요리사로서 그 나름대로 준비를 끝냈고, 아들도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잠시 마산 집으로 내려와 있었다.

손님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복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

그는 살던 집을 음식점에 맞게 고치고 먼저 간판부터 달았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첫 직장 동료들이 요리사의 새 출발을 축하한다고 한날에 모두 그 집으로 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후로 간판은 버젓이 달려 있는데도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몹시 궁금해 했다. 그래서 지난 9월 25일 동네 분들을 모시고 음식 대접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식점 문을 열게 되었다.

'요꼬쬬'를 운영하는 그의 철학은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것.
'요꼬쬬'를 운영하는 그의 철학은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 것.김연옥
박의흠씨는 '요꼬쬬'의 운영 철학을 한마디로 '선·정(鮮精)'이라고 설명했다. 즉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다는 의미로 그가 만든 말이다. 골목길에 있어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싼 가격으로 제공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요즘 들어 비로소 신문을 간간이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는 그.

"언젠가는 더 작은 규모의 음식점을 혼자서 하고 싶습니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날 내가 만든 요리를 설명해 주기도 하고 그들과 친구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요리사가 되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아마 짬을 내어 좋아하는 테니스도 치고 아내와 여행도 다닐 수 있겠지요."

나이 쉰 살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 하여 지천명(知天命)이라 말하기도 한다. 인생을 멋지게 살 줄 아는 그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지천명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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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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