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1500m에 펼쳐진 도로를 달리다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 17] 시안에서 란저우까지의 700Km

등록 2006.11.22 15:22수정 2006.11.2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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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침 일찍 짐을 꾸린다. 드디어 시안을 떠나 서역으로 향하는 본 궤도에 오르는 날이다. 시안에서의 며칠이 숨고르기 기간처럼 느껴진다. 많은 문화유적 덕에 근교를 숨 가쁘게 뛰어다녀야 했지만 근거지를 두고 움직인다는 안정감이 그런대로 먼 길을 앞둔 나그네에게 그런대로 힘이 되었다.

백구(1호차)와 파라곤(2호차) 모두 시동음이 실하다. 오늘 이동해야할 거리가 시안에서 란저우까지 700Km나 되는 길임을 아나보다. 312도로를 타고 해발 1500m가 넘는 황토고원지대를 지나야하는데 노면상태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어 도착 시간을 예측할 수가 없다. 만약 오늘 중으로 도착 못 한다면 무리한 야간 운행을 진행하지 않고 핑량(平凉) 쯤에서 자기로 했다.


a 개원문 실크로드 조형물. 서역 상인들이 장안을 떠나는 모습

개원문 실크로드 조형물. 서역 상인들이 장안을 떠나는 모습 ⓒ 오창학


과거 실크로드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은 성의 서쪽 통로인 안정문(安定門)을 통해 나갔다. 우리도 그 길을 통해 서쪽으로 나선다. 서안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이 보인다. 한 바리의 짐을 싣고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서역 상인들의 군상이 서 있다.

차에 바리바리 짐을 챙겨 올라탄 우리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제껏 인천에서부터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왔고 이미 한반도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노선을 밟아 예까지 이동한 터. 그러나 막상 과거 동서문물교류의 최대 기착지 장안을 벗어나는 지점에 서니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설레임이 있다.

거창하게 ‘탐험’이라는 제목을 붙인 우리 팀 깃발을 내어 기념촬영도 하고 아침 해를 등진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들을 훑는다.

“당신들도 서역을 향해 나서나 보지요?”
개원문 실크로드 석상 중 다소 젊은 상 하나가 말을 건다.
“그렇습니다.”
환영 속의 내가 답한다.

“어디서 오셨소?”
역시 환영 속에서 석상이 묻는다.
“해동국.”
“해동국 어디? 신라, 고구려, 백제? 아니면 남? 북?”
“해동국.”
석상 속 젊은이는 빙긋이 웃는다. 내 대답의 의미를 알았다는 모양.

사내의 웃는 모양이 낯익다.
“혹시 나다이 반다크?”
내 물음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 속 주인공에 대한 각인작용이 컸나보다.


a 실크로드 조형물 앞에 선 6인의 탐험대원. 이름 참 거창하다.

실크로드 조형물 앞에 선 6인의 탐험대원. 이름 참 거창하다. ⓒ 오창학


나와 환영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는 소그드족 상인이다. 페르시아나 아랍상인과 더불어 실크로드를 주름잡던 상인으로 작은 오아시스 도시국가의 상인이었음에도 이들의 상업활동은 눈부셨다.

오죽하면 소그드인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달콤한 언어를 구사하도록 입에 꿀을 발라줬으며 한 번 쥔 돈은 절대 새나가지 않게 손에 아교를 발라 주었다는 말이 퍼졌을까. 오늘날 유태인이나 화교도 이들 앞에선 한 수 접어야할 지도 모른다.


소그드 남자들은 스물이 되면 반드시 외국에 나가 장사를 했다. 중국의 장안에도 1000여명이 머물면서 활동했고 당시 위구르가 지배하던 몽골 등 초원에도 거점을 확보했다. 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유리, 모직품, 보석세공품, 향료, 악기 등을 중국에 가져가 팔고 중국의 비단 등을 서역에 팔아 이익을 챙겼다. 중앙아시아 비단길에서 소그드어는 국제 통용어였다.

나다이 반다크, 그와 개원문을 나섰다. 어느 구간까진 내 마음 속 동행이 될 게다. 백구에 실은 짐의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먼지 폴폴 날리는 무인지대를 지날 때마다 그 옛날 그가 낙타로 지났던 흔적을 느끼며 그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

a 중국은 지금 도로 공사 중. 거의 모든 도로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과 더불어 행군을 방해하는 2대 장애물.

중국은 지금 도로 공사 중. 거의 모든 도로에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트럭과 더불어 행군을 방해하는 2대 장애물. ⓒ 오창학


중국 전역은 현재 공사 중이다. 동부건 서부 타클라마칸 사막이건 간에 모두 공사 중이다.현재 엄청난 돈을 도로망 확충에 쏟아 붓고 있다. 2004년 말 당시 3만4000km의 고속도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2000년에 비하면 두 배로 늘어난 양이다(17년 전에 고속도로는 없었다). 중국 전역의 도로망은 세계 3번째인 180만km. 이중 44%가 지난 15년 동안 건설된 것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2020년까지 고속도로를 6만8000km로 늘릴 계획이라니 앞으로 10년 이상 온 도로가 공사의 열풍에 휩싸일 것이다.

중국 신화통신이 떠벌렸던 것처럼 중국은 이미 자동차 대량소비시대로 진입했다. 2004년 자동차 내수가 500만대. 미국의 1700만대와 일본의 500만대에 이어 세계 3위였다. 지금 이라면 일본을 제치고 2위의 반열에 올랐을 테고 2010~2015년 사이면 1위의 자리에 등극할 것이다. 2000년대 중국은 자동차 열병에 걸려 있다. 어쩌면1920년대 미국의 모습 보다, 1990년대 후반의 우리 보다도 집착이 깊다.

a 유쾌하진 않지만 도로에서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다. 이럴 땐 정신이 바짝 든다.

유쾌하진 않지만 도로에서 자주 보게 되는 광경이다. 이럴 땐 정신이 바짝 든다. ⓒ 오창학


중국을 다녀온 누가 그랬다. “중국의 혼란스러운 교통질서에 비하면 사고 참 안 나는 편”이라고. 모르는 소리. 사고 많이 난다. 꼭 통계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다니다 보면 사고의 흔적을 자주 목도한다. ‘교통 질서’라는 개념이 서구 혹은 여타 자동차 선진국과 무척 다르게 적용 되고 있다. 문화의 진보 속도는 물질의 진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도 이런 과도기를 겪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역시 지금 이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비로소 고속도로가 아닌 길을 수백 Km 운전하며 중국의 운전 습관에 대해 마음을 연다. 편도 일차선 뿐인 차도를 대형화물차들이 틀어 막으니 연신 중앙선을 넘어 추월할 수밖에 없다. 추월을 시작하면 맞은 편에서 오던 차는 갓길로 붙어 자리를 내 준다.

“너 중앙선 넘었어? 그럼 내가 갓길로 가지”하는 마음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저편에서 추월차량이 중앙선을 넘어 내게 달려올 때마다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반짝이는 짓을 그만둔 지 오래다. 우측으로 붙어 그 차가 지나갈 공간을 내주면 그걸로 그만이다. ‘노란선은 넘어선 안 되는 선’이란 한국에서의 고정관념을 버리면 마음은 한결 여유롭다. 여기는 중국이 아닌가.

a 핑량 근처의 황토 고원 지대. 산과 산을 이어 놓은 듯한 길을 끝 없이 간다.

핑량 근처의 황토 고원 지대. 산과 산을 이어 놓은 듯한 길을 끝 없이 간다. ⓒ 오창학


붕 뜬 느낌으로 한 없이 달린다. 해발 1500m 이상에 펼쳐진 도로의 연속이다. 산과 산을 연결해 놓은 은 아치식 교량을 지날 땐 현기증마저 인다. 좌우 전망은 굽이굽이 계단식 논같이 층진 황토야산으로 가득 차 있다. 그 풍경들을 보노라면 벌써 여러 시간째 운전석에 앉아 있는 답답함이 싹 가신다. 목 좋은 장소에선 여지없이 무전이 날아온다.

“사진 한 장 박고 가지요.”
달려가며 보기엔 정말 아까운 전경. 외진 길을 돌아돌아 어렵게 온 보람이 있다.

a 중국에서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으신 교수님.

중국에서 처음으로 운전석에 앉으신 교수님. ⓒ 오창학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 천진에 들어온 이래 오로지 여기까지 나만 쥐고 있던 백구의 운전대를 교수님께 넘겼다. 오늘 거리가 워낙 장거리이기도 하고 시안 같은 복잡한 대도시는 지나왔으니 이런 시골길에서 다른 운전자가 적응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싶었다.

임시 운전면허를 발급 받은 게 1호차 내에선 나와 아내뿐이어서 교수님까지 운전 부담을 안겨 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아내와 2교대로 달리려다 보니 메모나 사진 촬영 등 다른 활동에 눈 돌릴 여지가 없었다. 드디어 교수님의 ‘무면허’ 운전이 시작된 것이다.(외국인 차량에 대해서도 심심찮게 면허증 검사가 있다. 트인 시골길이나 고속도로에서나 살금살금 가능한 일이다)

a 질주, 질주, 질주....그러나 모든 길이 이리 순탄한 것은 아니다.

질주, 질주, 질주....그러나 모든 길이 이리 순탄한 것은 아니다. ⓒ 오창학


한국에서 구비문학 자료 채록 때문에 전국 각처를 사륜구동으로 누비신 경력이 있어서인지 처음 타보는 차종임에도 적응이 빠르시다. 그런데 문제는 적응이 빨라도 과도하게 빠르다는 점. 백구는 나는 듯이 달려 앞 차 옆 차를 추월하고 오로지 앞으로 내달아 꽂힌다. 살짝 천정의 손잡이를 쥐었다. 잔뜩 움추린 가슴으로 한참을 가다가 뒤를 보니 2호차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로밍해 간 휴대 전화가 울렸다. 2호차다. 휴식처에서 합류한 2호차 사람들 표정이 격앙되어 있다. 뒤 차는 생각 않고 내빼면 어쩌냐고, 애타게 무전을 해도 왜 답이 없냐고 야단이다. 살펴보니 무전기 채널이 돌아가 있다. 아직 무전기 조작에 서툰 교수님이 채널 단추를 잘못 누르셨다. 훌륭한 중국에서의 운전 데뷔. 그러나 약간의 가슴졸임을 동반했다.

a 자동차 여행의 자유로움. 가고 싶을 때 간다. 서고 싶을 때 선다.

자동차 여행의 자유로움. 가고 싶을 때 간다. 서고 싶을 때 선다. ⓒ 오창학


아, 바로 이 맛이다. 내 차를 끌고 애써 실크로드에 오른 이유가. 기차도 버스도 흉내내지 못할 바로 이 맛. 서고 싶을 때 서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다는 것. 밀 타작을 하는 들판 풍경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또 멈춰섰다.

일행은 좌우 어디론가 흩어져서 각자 볼일(체내 노폐물을 방출하는 작업의 또 다른 말)을 본다. 그리고는 제각각 들판의 고즈넉함과 산에 맞닿은 푸른 하늘을 한껏 마신다. 이 순간 만큼은 500~600위안의 중국 농가 저소득을 염려하지 말자. 그냥 그대로 들판에 안긴 사람과 흐르는 구름만 보자. 참 푸른 하늘이다.

a 란저우 요금소. 시안을 떠나 15번 째 요금소.

란저우 요금소. 시안을 떠나 15번 째 요금소. ⓒ 오창학


요금소.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많다. 시안에서 란저우까지 10여 차례가 넘는 요금소를 거쳤다. 차량 당 200위안이 넘는 통행료를 지불했으니 거의 차량 연료비에 육박하는 비용이 도로비로 지출됐다. 고속도로를 달린 것도 아닌데 웬 요금소가 이리 많나. 그래도 이 요금소는 반갑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 란저우. 14시간의 운전 끝에 드디어는 어둠에 잠긴 도시에 닿았다.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엔 길안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작은 푯말을 들고 있다. 원하면 그 사람들을 태우고 길 안내를 시키면 되는데, 운전경력이 없는 사람이어서 자가용의 시선이 아닌 버스 노선에 근거해 안내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은 택시를 앞세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숙소 인근까지 잘 찾아 왔다.

a 란저우 라면 맛 보기.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먹는 것으로. 사필귀식.

란저우 라면 맛 보기. 일과의 마무리는 언제나 먹는 것으로. 사필귀식. ⓒ 오창학


이동의 끝은 항상 음식이다. 숙소에 짐 풀고 그 유명하다는 란저우 라면을 먹으러 나섰는데 쯧쯧…. 10시 넘긴 이 시간에 문 연 집이 있나. 다행히 숙소가 역 근처인지라 초라한 음식점 몇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국경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 역 근처 식당은 맛이 없다. 내일은 일찍 병령사를 거쳐 우웨이(武威)로 가야하니 사실상 란저우 라면은 이 한 끼가 끝이어서 아쉽다. 왜 옛말에도 있잖은가. “잘 먹은 음식 한 끼, 열 유적 안 부럽다.” 여행자의 수칙이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들어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일주하고 칭하이성을 거쳐 돌아와 고비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 란저우를 거쳐야 한다는 점. 그땐 꼭 제대로 된 란저우 라면을 맛보리라.

무리한 운전으로 어깨가 무겁다. 아내는 숙소 옆에 있는 맛사지집에 나를 밀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철봉씨와 뭉친 몸을 풀라며 은전을 베푼다. 전신맛사지 요금을 내고 몸을 맡겼는데, 무서워서 혼났다.

왜 그런 집 있잖아. 칸막이 쳐진 침대에 빨간 불 아롱거리는. 이 상태에서 돈 더 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맛사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놀란 가슴을 안고 숙소에 올랐다. 하루,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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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 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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