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기가 서린다니 근심이 태산이로다

[태종 이방원 5] 평생 혁명동지와의 만남 ②

등록 2006.12.04 09:30수정 2006.12.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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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의 대가 하륜이 던진 충격의 한마디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하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기가 서립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민대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까무러치게 놀랐다.

"아니, 하공? 그게 정말이오? 당치않은 얘기 하지 마시오."

외마디 소리를 지른 민대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륜의 말이 정말이라면 기쁜 일이 아니라 삼족이 멸할 흉사다. 지금 개경에 왕(王)씨 말고 왕기를 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민대감의 고성에 놀라 마당에서 잔치 음식을 먹던 하례객들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내, 못들은 것으로 할 터이니 그런 소릴랑 당최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민대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수상한 세상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스님


맛있는 전을 입속에 우겨넣던 무질이 봉창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은 채 동생 무휼이의 손을 잡고 대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문밖에 서성이는 동네 친구들에게 만난 음식 자랑을 하기 위해서다. 이때 대문을 들어서던 지팡이에 걸려 넘어졌다.

"인석아, 앞을 보고 뛰어가야지."

지팡이의 주인을 바라보니 하얗게 수염을 기른 스님이 장갓을 쓰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님이 뭔데 대감댁 도령에게 인석이라 하시오?"

눈을 치뜨며 스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깊은 산에 틀어박혀 수도 정진해야 할 스님들이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많은 폐단을 낳다 보니 어린 아동들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했다. 공민왕의 신임을 빌미로 전횡을 일삼던 신돈이 역모를 획책하다가 처형된 이후로 스님들의 위상이 더욱 추락했다.

"고 녀석, 고얀 지고…."

말끝을 흐리며 마당으로 들어선 스님은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따라 개다리소반에 음식이 차려져 내왔다. 상차림을 흩어보던 스님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이렇게 좋은 안주에 술이 없어서 되겠느냐? 곡차도 내 오너라."

하례객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놓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바쁜 하인을 붙잡고 힐난조의 호통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던 하인이 스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스님도 술을 잡수십니까?"
"이 녀석아 내가 언제 술을 내오라 하였더냐?"
"곡차가 술이 아니고 뭐입니까?"
"나는 곡차를 내오라 하였으니, 술을 내오던 곡차를 내오던 그건 네가 할 따름이다?"

하인은 어이가 없었다. 말문이 막혀 스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오늘같이 좋은 날 시비를 한들 무엇하랴. 오늘은 대감 나으리 둘째딸 시집가는 잔칫날인데 허허 웃어야지. 마음을 다잡은 하인은 호리병에 담긴 술 한 병을 내다 주었다.

글씨를 남긴 스님은 홀연히 사라지고

잔치가 파할 무렵, 하인 장쇄가 민대감이 있는 사랑방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마님, 음식에 술까지 얻어먹은 중놈이 곡차 값을 해야겠다며 지필묵을 내 오라는뎁쇼."

스님의 하는 행동거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다.

"어디에서 온 누구라더냐?"
"지나는 객승인데 술값을 하겠다며 저 푼수를 떨고 있습니다요."
"하하하, 스님이 잔칫집에서 술 얻어 마시고 술값이라? 거 일리 있는 얘기다. 그렇다면 내다 주어라."

수염을 쓰다듬던 민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지필묵을 내다 주라고 일렀다.

잠시 후, 장쇄가 스님이 써주고 간 글씨라며 두루마리를 민제에게 내밀었다. 글씨를 펼쳐든 민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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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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