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것이 포항으로 간 까닭은?

[겨울바다를 찾아서 ①] 추억을 밟으며 걷다

등록 2006.12.06 11:56수정 2006.12.0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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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a 실로 오랜만에 와 본 포항역. 변했지만 나직한 모습만으로도 정겹다.

실로 오랜만에 와 본 포항역. 변했지만 나직한 모습만으로도 정겹다. ⓒ 이동환

첫 날 겨우 8km 걸어 포항시 흥해읍 옥성리에 짐을 풀다


@BRI@ 12시 48분 포항역에 도착했다. 기차 타고 오며 내내 생각하니 마누라가 은근히 괘씸하다. 동료강사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 모두 걱정하는데 마누라만 '잘 다녀오셔!' 한 마디뿐이었다. 집 떠난다는데, 그것도 보름여를…, 아무래도 사랑이 식은 게지?

"나 없는 동안 문단속 잘 하고, 어머니 잘 부탁해. 그리고 제발 가스 중간밸브 좀 꼭 확인해! 그런데…, 당신 정말 걱정 안 돼?"
"걱정은 무슨? 당신이 오죽 꼼꼼하게 스스로 챙길 사람이야? 아주 속 시원하다. 이참에 나도 자유 좀 맛보자고요."


자유를 맛봐? 남편이 보름 동안 가출(?)한다는데 걱정은커녕 속 시원해? 등짐장수처럼 15kg 나가는 배낭을 메고 하루 15km씩 걷는다는데 뭐라? 솔직히 조금은…, 아니 많이 서운했다. 그러나 이내, 포항역 사진을 찍고 한참 부글거리던 나는 선배 말을 떠올리며 씩 웃고 말았다.

"나는 우리 마누라가 나를 너무 끔찍이 사랑해서(못 믿어서) 하루 외박도 난리가 나는데, 너는 제수씨가 포기했나보다(믿나보다)!"

내가 포항을 먼저 찾은 까닭은?


a 포항역사 지붕에서 해바라기 하는 비둘기들. 괜히 반가워 소리치니 힘찬 날갯짓으로 화답한다.

포항역사 지붕에서 해바라기 하는 비둘기들. 괜히 반가워 소리치니 힘찬 날갯짓으로 화답한다. ⓒ 이동환

a '구 울릉도행 선착장', 냄새는 여전하다. 내가 열네 살 때 추위에 떨며 숨 막혀 하던 바로 그 냄새.

'구 울릉도행 선착장', 냄새는 여전하다. 내가 열네 살 때 추위에 떨며 숨 막혀 하던 바로 그 냄새. ⓒ 이동환

내가 겨울바다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태어나 처음 본 바다가 겨울바다요(속초 아바이 마을 앞바다), 어린 시절부터 낫살 먹을 때까지 소슬한 추억이 아리게 배어 있는 곳이 또한 겨울바다(유난히 동해)이기 때문이다.

a 아무리 뒤바람이 무서워도 고깃배는 언제나 출어준비를 한다. 그게 삶이다.

아무리 뒤바람이 무서워도 고깃배는 언제나 출어준비를 한다. 그게 삶이다. ⓒ 이동환

<학원(學園)>이란 잡지를 아시는지? 1952년 11월에 창간해 1979년 3월에 폐간되기까지 이 땅 거의 모든 학생들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잡지! 사실, 중고등학생을 위한 잡지였지만 잔망한 것도 모자라 되바라졌던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탐독하고 있었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소위 '펜팔코너'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a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 진땀 흘리며 '소티재'라는 고개를 넘고 보니 다섯 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서녘이 벌겋다.

무섭게 달리는 차들을 피해 진땀 흘리며 '소티재'라는 고개를 넘고 보니 다섯 시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 서녘이 벌겋다. ⓒ 이동환

이른바 '날림성(낚시질)' 자기 소개글에 낚여 난생 처음 편지를 쓰게 만들었던 아이. 부산시 동대신동에 살던 선영이. 그 아이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것만은 틀림없다. 서너 통 편지를 쓰다가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소위 '교환일기'를 받고 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사진을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요즈막 시쳇말로 30초 '첫 느낌'에 '뻑' 갔다는 얘기지.

그는 모르지만 나는 점점 야릇한 감정에 빠진 듯하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무려 1년여를 그렇게 애틋하기만 했다. 그런데 열네 살 넘어가던 해 여름, '포항으로 갑자기 이사 갈 수밖에 없으니 나중에 먼저 연락할 게'라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a 이정표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 바다로만, 바다로만 내달릴 차례다.

이정표가 고맙기만 하다. 이제 바다로만, 바다로만 내달릴 차례다. ⓒ 이동환

그게 끝이었다. 나는 거의 미쳐갔다. 열네 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거시기가 뭘 알아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학교 선생님들이 내 멍한 표정을 탓할 정도였으니까. 공부가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교과서를 펴면 선영이 얼굴이 드러났다. 바싹 야윈 채 좀비 저리가라 할 정도가 되어 잠이라도 청할라 치면 천장에 그 아이 얼굴이 또록또록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했다. 그 해 겨울. 내 생애 처음 가출을 시도했다. 부자 간 세대 차이는 커도 어렵사리 대화는 이어가던 사이였다. 그러나 통사정을 올렸는데도 아버지는 '절대루 안 됨매. 지발 이 아바이 탕갯줄 좀 끊지 마라이. 니 시방…, 제 정신임둥?' 하시며 요지부동이었다. 바로 튄 거지 뭐. 돈도 별로 없이.

어찌어찌 포항까지 오기는 했는데…, 대책이 없었다. 그제야 무모한 여행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쓰린 가슴 부여안고 나는 무작정 바다를 찾았다. 그게 바로 '구 울릉도행 선착장'이다. 왜 그리 춥던지…. 사타구니가 꼬들꼬들 비틀어질 무렵 나는 비로소 수중에 돈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선착장 된바람을 맞으며 생각한 게 파출소였다. 허든거리며 찾아들어가, 서울 가는 차표 좀 끊어달라고, 나중에 우체국으로 부쳐 드리겠다고, 우리 아버지가 행세깨나 하는 사업가라고…, 그 와중에 새살거릴 용기는 어디서 났는지, 아무튼 열네 살 설익은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지금쯤 아들딸 두엇 두고 참하게 사는 이 시대 어머니가 되었을 선영이!

내 마지막 사랑 잉걸엄마를 만나기까지

수컷본능 따위 나는 모른다. 다만 사내들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기 힘들다는 사실만 안다. 그게 수컷본능이라고 따져들면 할 말 없다. 어쨌거나 나 역시 좁쌀 시절부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헤아릴 수없는 방황을 했다. 20대, 역마살 잔뜩 끼어 허섭스레기처럼 날뛰었던 그 모든 시간 종점에 지금은 낯도 떠오르지 않는 몇몇 여자들이 있었다.

결국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내게는 물론 잉걸엄마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깟 사랑뿐이 아니라, 낫살 더 먹기 전에 무언가 '마음정리'가 필요해 길을 나섰다. 무모할 수도 있다. 학원에 처박혀 밥 버느라 앞뒤 분간도 못 하고 살아온 시간들. 이제 더 나이 먹기 전에 돈에 매달리지 않고, 치졸하지 않게 차분히 살 깜냥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이 힘든 여행을 포기할 수 없다.

잉걸엄마! 내 가출을 허락해줘서 고마워. 이왕 선심 쓰셨으니 벌써 욱신거리기 시작한 내 무릎에 '호…!' 해줘. 결국, 며칠 걷기 연습 더하기 실전 하루 만에 압박테이핑 치고 말았어. 이 무모한 여행이 다, 나중에 당신 무릎에서 숨 거두고 싶어서라는 사실만 알아줘요."

덧붙이는 글 | 추억 가운데 거론한 '선영이'는 어쩔 수없이 가명을 썼음.

덧붙이는 글 추억 가운데 거론한 '선영이'는 어쩔 수없이 가명을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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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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