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얻어맞은 기억, 이젠 추억으로

[겨울바다를 찾아서 ②] 월포 들러 대게원조마을까지

등록 2006.12.08 12:03수정 2006.12.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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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째, 20km 걷고 원조대게마을에서 까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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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환

포항시 옥성리에서 하룻밤 묵고 7일 아침 7시쯤 길을 나섰다. 아랫녘이 아니면 맛보기 힘든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당차게 나서기는 했는데…. 오늘 목표는 칠포해수욕장을 거쳐 월포해수욕장에 들러 추억을 더듬고, 버스로 영덕군 대게원조마을까지 가서 짐을 푸는 거다. 월포까지 15km 정도 예상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 못 접어들었다. 돌고 돌아 결국 20km를 걸은 셈인데 아직 적응이 안 됐는지 몸이 이거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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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환

차도 사람도 없는 길을 끝없이 걷자니 갑자기 외롭다. 배낭끈이 자꾸 어깨를 판다. 걷는 것보다 사실 15kg 배낭 짊어지고 숨 고르는 게 더 힘들다. 몸이 힘든 대신 가쁜 숨소리와 함께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래, 언제 내가 이렇듯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봤던가. 나를 위한 사치! 아무렴, 이 정도 사치라면 힘든 것쯤 이겨낼 수 있다.

@BRI@포항시 흥해읍 칠포리, 칠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곤한 여행자를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맞는다. 하늘과 바다가 한통속으로 푸르디푸르다. 지난 1977년 개장한 칠포해수욕장은 은가루 같은 잘고 흰모래가 200∼300m 너비로 4km나 이어지는 장관이다. 백사장 면적만 4만 평이다.

살을 파는 뒤바람 따위 아랑곳없이 나는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한겨울 바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배낭을 아무 데나 던져놓고 나는 바다를 향해 목청껏 소리친다.

은모래를 희롱하는 여린 물결을 약 올리며 발장난을 치자니 어느새 한소끔 너울이 달려온다.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다가 그예 모래사장에 넘어지고 만다. 그런 김에 큰대자로 몸을 뒤집고 하늘을 본다. 아무 생각 없다. 그런데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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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환

길을 재촉해 월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칠포부터 월포까지는 온통 바다와 맞닿은 길이다. 중간 중간 볼 게 너무 많다. 말라버린 나무, 한겨울에 바다낚시 즐기는 사람들, 해바라기에 정신없는 갈매기 떼….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한가롭다. 겨울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배낭끈이 자꾸 어깨를 파고든다. 아무래도 이 배낭, 무슨 조치를 취해야만 할 듯싶다.


a 코앞이 바다인데도 방풍림 덕에 논농사가 가능하다. 수백 년 말없이 바람막이가 되어준 방풍림처럼 나는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까?

코앞이 바다인데도 방풍림 덕에 논농사가 가능하다. 수백 년 말없이 바람막이가 되어준 방풍림처럼 나는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바람막이가 될 수 있을까? ⓒ 이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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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환

칠포에서 월포까지 멋지게 단장한 음식점이나 숙박시설이 주룩 이어진다. 그중 하나, 버섯모양 황토집 앞에서 나는 한참을 붙박인 채 서있었다. 부럽다! 지천명을 넘기면 나도 이런 한갓진 데 아담한 황토집 짓고 돈 걱정 따위 안 하며 살 수 있을까? 사실 내 꿈은 나이 오십 넘으면 도시를 탈출하는 거다. 손수 황토 이겨 벽을 바르고 통나무 덧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직접 집을 짓는 거다. 조촐한 차와 술을 팔며 욕심 없이 살고 싶다. 될까?

월포 바다여, 너! 30년 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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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환

드디어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리, 월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칠포보다는 규모가 작다. 칠포가 은빛모래 일색인데 반해 월포는 백사장이 자갈과 섞여 있다. 백사장 면적은 2만여 평, 길이는 1.2km, 폭은 70m, 수심은 1~2m 정도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 수심이 너르게 얕은 편이라 가족휴양지로는 제격이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해 바다낚시에 푹 빠질 수 있고 언제나 손맛이 일품이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갓 열여섯, 차오르는 청춘 다섯이 바로 이 월포를 찾았다.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다가 한 친구가 자기네 친척집이 있다며 우리를 이끈 곳이다. 너무 좋았다. 부서지는 태양 아래 파도와 어우러져 우정과 순수를 모개로 나누며 개구리처럼 이리 뛰고 저리 엎어지는…, 한 사흘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흘짼가? 밤이 늦도록 바닷가에 머무른 게 화근이었다. 아니, 한 친구가 사이다병에 술을 몰래 담아온 게 불씨였다. 나는 마시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거의, 한 모금씩 입에 물었다가 "아이, 써!" 하며 뱉어버렸다. 문제는 술을 가져온 녀석이었다. 제법 몇 모금 들이키고는 그럭저럭 새기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막 소리까지 치는 게 아닌가.

"어쭈? 이 쬐끄만 것들이 하! 세상 참 말세여.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술을 다 쳐마시고!"

청년 서넛이 언제 우리 언저리에 와 있는지도 몰랐다. 사위는 캄캄했고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세 친구는 잽싸게 도망쳤고 나와 흥순이라는 친구만 붙잡혔다. 일차로 몇 대 맞고 무릎 꿇은 채 벌벌 떨고 있는데 한 청년이 손전등으로 우리 둘을 이리저리 비춰 보다가 나를 지목했다. 언뜻 보니 한 쪽 얼굴에 화상이 심했다. 그에게서 강소주 냄새가 확 풍겼다.

"너, 왜 그렇게 재수 없이 생겼냐?"
"네?"
"왜 이리 빤질거리게 생겼냐고?"
"……?"
"뻔들거리는 새끼들은 다 죽어야 돼!"


a 30년 만에 다시 찾은 월포 바다. 싱그럽고 순수했던 나는 어느새 중년을 넘겨버렸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월포 바다. 싱그럽고 순수했던 나는 어느새 중년을 넘겨버렸다. ⓒ 이동환

그렇게 맞아 본 건 처음이었다. 말씨로 보아 타지에서 놀러온 청년들이었다. 잘못했다고(이유는 모르지만), 살려달라고(제발!), 아무리 빌어도 소용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 이후 나는 20대 중반, 인천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까지 해안선을 따라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지만 월포 만큼은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a 대게원조마을. 한겨울, 땅거미 진 뒤라 그런지 스산하기까지 하다.

대게원조마을. 한겨울, 땅거미 진 뒤라 그런지 스산하기까지 하다. ⓒ 이동환

오후라 그런지 바닷바람이 점점 거세다. 월포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상념에 빠졌던 나는 다시 배낭을 멨다. 영덕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2km를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덕에서 다시 대게원조마을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하다. 저녁식사만큼은 좀 사치스럽게 이 마을에서 제일 큰 대게찜으로 하려고 했더니 웬 걸? 대게마을에 대게가 없단다. 그나마 있는 집도 대게 꼬락서니가 영 아니다. 잠깐…, 슬프다!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덧붙이는 글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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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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