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눈으로 밤 샌 어미 생각 안 하냐?

[겨울바다를 찾아서 ③] 대게원조마을에서 울진까지

등록 2006.12.08 12:03수정 2006.12.09 15:03
0
원고료로 응원
사흘 째, 어머니 사랑에 힘입어 다시 걷다

a 대게마을 아침. 흐린 날 바다도 괜찮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대게마을 아침. 흐린 날 바다도 괜찮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 이동환

@BRI@지난 밤, 하염없이 까라졌던 모양이다. 대게원조마을에 도착해 방을 잡고 저녁 7시에 쓰러져 무려 열세 시간을 잤다. 내 평생 이렇게 원 없이(?) 자 본 적이 없다. 어머니 전화가 아니었다면 한낮이 되도록 못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왜 어젯밤 전화 안 했냐? 무슨 일 있니?"

하루 두 번 아침 열시, 밤 열시에 전화 꼭 드리기로 했는데 지난 밤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잠자느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일 년 넘게 투병 중이신 팔순 어머니. 당신 고통 이기기도 힘든 밤을 하얗게 새셨다니 이런 죽을죄가 없다.

"아무 일 없다니 됐다. 제발 전화만큼은 잊지 마라. 그래, 밥은 먹었니? 아픈 덴 없고?"

아들 나이 오십을 바라보도록 어머니는 볼 때마다, 목소리 들을 때마다 '밥 먹었니?'하신다. 갑자기 가슴께가 싸하다. 눈물이 핑 돈다. 무슨 말이 필요 있으랴? 어미에게 자식이란 영원히 강보에 쌓인 핏덩인 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항구, 그 바다 같은 인심


a

ⓒ 이동환

여행 셋째날인 8일. 날씨가 너무 흐리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다. 폭풍우가 아니라면 까짓 걷는 거지 뭐. 가만 보자. 오늘은 축산항에 들렀다가 영해까지 버스로 가서 괴시리전통마을과 인량리전통마을까지 왕복으로 걸어봐야지.

축산항에 도착해 일단 버스에서 내렸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배들이 출어할 생각은 없나보다. 사진을 찍으며 갯내에 취해 있는데 누가 말을 건다.


"어데 가니겨?"

돌아보니 할머니다. 내 어머니 연세쯤 되셨을 터. 이남박을 내려놓고 낯선 객에게 하회탈 같은 웃음을 보이시며 잔잔히 말을 건넨다. 그저 정겹다. 어디서 왔는지, 뭐하고 다니는지, 왜 혼자 다니는지, 가족은 있는지, 어디까지 가는지…. 담배 한 대 빼드리니 연신 고맙다는 말씀이다. 배낭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드렸더니 '이 비싼 걸!' 하시며 함박웃음이다. 이런저런 이바구와 정 담뿍 받으며 중년 객은 괜스레 송구하다.

"날이 씨불면 배 몬 나가. 여긔 축산은 맨 과부래. 시차(주검)도 몬 찾은 차로 죽지 몬해 살지 모다. 내도…, 이리 날이 씨불면 괜히 슬프다 안카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전통마을

a 영덕충효당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조선 성종 때 세웠다. □자형 건축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영덕충효당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조선 성종 때 세웠다. □자형 건축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 이동환

a 우계종택은 ‘이애’의 증손자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이었다. 400년 가까이 우계파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우계종택은 ‘이애’의 증손자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이었다. 400년 가까이 우계파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 이동환

a 갈암종택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의 종택이다.

갈암종택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영남학파 거두 ‘갈암 이현일’의 종택이다. ⓒ 이동환

축산에서 영해까지 다시 버스를 탄 뒤 드디어 걷기 시작해 인량리 전통마을에 도착했다. 현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 해서 인량리(仁良里)다.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지어진 □자형, 一자형 전통가옥이 20여 채나 있고, 이 지방에서는 독특한 ㄷ자형도 있다. 이 마을은 이문열이 쓴 소설 <선택>의 배경이기도 하다.

울진에 도착해 짐을 풀다

a

ⓒ 이동환

영해에서 괴시리로, 다시 인량리까지 왕복하고 나니 진짜 어깨가 빠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편의점에 들렀다. 배낭을 풀어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죄다 챙겨 택배로 집에 부치고 나니 한결 살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울진에 도착하니 마침 2일, 7일에 서는 오일장이란다. 오후 네 시가 넘어서인지 거의 파장인데 하나라도 더 팔고자 남은 어르신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a

ⓒ 이동환

a

ⓒ 이동환

파장도 한참 지난 끝 무렵 오일장을 시큰둥하게 구경하고 울진상설시장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이 참 좋아보였는데 새 건물 뒤는 여전히 어두컴컴한 재래시장 모습 그대로였다. 재래시장이 점점 힘들다는데 그저 안타깝다.

a

ⓒ 이동환

a

ⓒ 이동환

대게원조마을에서도 못 본 대게가 울진시장에 지천이다. 내가 어린애처럼 흥감해 하니까 주인이 사진 찍으라며 큰 놈 골라 바닥에 내려놓는다. 친절하게 뒤집어주기까지. 대게원조마을은 12월 중순이나 돼야 대게 철이란다. 마침 대게 사러 온 손님 때문에 자세히 묻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싱싱한 대게를 직접 보니 흐뭇하다. 오늘 저녁, 이거 두어 마리 찜으로 탕으로 먹어봐? 음…, 참자. 중년 객이 혼자서 청승맞게, 거한 상은 좀 그렇다.

덧붙이는 글 |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덧붙이는 글 11월 말부터 나는 들떠 있었다. 3년여 만에 황금휴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나갈까? 어디 좋은 데 없나? 이런저런 계획을 짜던 나는 결국 포항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북진여행을 하기로 했다(하루 15km씩 걷고 나머지는 차로 이동). 한겨울에 도보여행이라니 주변에서는 걱정 일색이다. 내가 속한 지역모임에서는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어쨌거나 나는 12월 5일(화), 서울역에서 아침 7시 40분발 포항행 기차를 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5. 5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