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제자, 그리고 당황한 스승

[태종 이방원 8]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등록 2006.12.07 13:49수정 2006.12.08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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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소년

어느 날, 스승의 먼발치에서 공부하던 이방원이 당돌하게 물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사부님께서 대학 8조목으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순서는 불변의 진리입니까?"
"그 순서가 옳은 길이라고 옛 선현들이 말씀하셨느니라."

"자신의 몸을 갈고 닦은 사람만이 가정을 이룰 수 있고, 가정을 잘 건사한 사람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됩니다.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너의 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스승은 답을 주지 않고 이방원의 학습 진도를 확인하기 위하여 되물었다.

@BRI@"자신의 마음을 바루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려도 평천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침없이 속내를 풀어놨다. 단순한 성격 그대로다.


"고얀 놈 같으니라고, 걷지도 못하는 놈이 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려 드느냐?"

스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노기 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가정을 잘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라를 다스리려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학문과 스승을 모독하는 처사로 여겨졌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학의 4서 5경 중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8조목으로 되어있어 <대학> 8조목이라고 부른다. <대학>은 이 8조목을 해설한 책이다.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이기심성학으로 발전하였고, 북송시대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가미한 것을 남송시대 주희가 완성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大學章句(대학장구) 朱熹(주희)
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물격이후지지지지이후)
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의성의성이후심정심정이후)
身修身修而后家齊家齊而后(신수신수이후가제가제이후)
國治國治而后天下平(국치국치이후천하평)


시대를 꿰뚫어보는 예리함에 충격받은 스승

"사부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방원은 스승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당돌하기도 했지만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는 것도 빨랐다. 스승은 순서와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이방원의 생각이 발칙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가르쳐 주었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잊었느냐? 사물을 궁구하여 그 앎을 투철히 하고 몸과 마음을 바로이 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앎을 자신과 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흐르는 정신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목의 으뜸은 수신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평천하(平天下)는 덕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방원이 바닥에 코가 닿도록 넙죽 절하며 주억거렸다.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던 방원이 아스라이 보이는 송악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작심한 듯 스승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이 마음을 갈고 닦아 가정을 이루고 성의 정심으로 깨우친 몸과 마음으로 앎을 베풀기 위하여 치국에 나서도 평천하를 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한 사람이 만 사람을 평하게 하는 것은 환상일까요?"

혼란한 시대의 정곡을 찌르는 이방원의 물음에 스승은 놀랐다.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질타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인임을 비롯한 이색, 정몽주, 길재, 이숭인 등 당대의 석학들의 무능력이 문제냐? 학설이 잘못된 것이냐? 추궁하는 목소리로 들려왔다.

이즈음,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고려 왕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상황이었다. 공민왕이 총애하던 익비와 신하 홍륜이 사통하여 임신하고, 그 사실을 밀고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으려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최만생을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되치기 당하여 침전에서 살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패망으로 가는 왕조말의 징후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했다. 신돈의 시녀 반야가 낳았으니 틀림없다는 카더라성 소문이다. 훗날 공민왕이 반야에게 홀려 신돈의 집을 잠행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밝혀졌지만 소문의 속성상 추측에 억측을 더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도성의 민심이 흉흉했다.

장본인 우왕은 황음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있었다. 나라를 바로 잡아야 할 권신은 세력다툼에 혈안이 되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권문세족과 사찰은 토지를 장악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춥고 배고픈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토해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었다.

"오호, 너의 학문이 여기까지 왔느냐? 기특하구나."

충격을 애써 감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스승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에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직 약관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논하는 제자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어제의 벗이 오늘 적이 되고,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중상모략과 암투가 난무하는 혼란의 시대를 꿰뚫어 보고 있는 이방원의 예리함에 소름이 끼쳤다. 제자가 아니라 한 마리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거급제하고 색시 얻은 이방원

천성에서 묻어나는 날카로움이 두려웠을까? 훗날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여 스승 원천석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원주에 은거하며 응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치악산 깊은 산골짜기까지 찾아가 뵙기를 청했으나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고려조에 불충한 사무친 원한과 제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한 회한 때문이었으리라.

이방원은 이렇게 공부하여 1382년 치러진 진사시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고, 내친걸음에 문과에 도전하여 7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때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이 김한로, 심효생, 이래, 성부, 윤규, 윤사수, 박습, 현맹인 등이었다. 과거급제하던 해에 장가도 들었으니 경사가 겹친 것이다.

수석으로 합격한 김한로는 훗날 이방원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장인이 되었으며, 2등으로 합격한 심효생은 강씨의 소생 세자 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래는 이방원의 맏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박습은 태종시절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까지 올랐으나, 세종의 장인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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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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