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측하게 일그러진 것은 내 마음자리였다

채규철 선생에게 진 마음의 빚

등록 2006.12.15 10:46수정 2006.12.1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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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생은 가난한 남편을 둔 아내의 이름으로 사인을 해주셨다.

선생은 가난한 남편을 둔 아내의 이름으로 사인을 해주셨다. ⓒ 송성영

아이들에게 'ET 할아버지'로 불렸던 채규철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선생에게 진 빚을 떠올렸다. 나는 오래된 취재 수첩을 꺼냈다.


6년 전, 한국의 대안학교를 둘러보러 다니다가 경기도 가평군에서 두밀리 자연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채규철 선생을 만나 뵌 적이 있었다.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아이들을 방목한다는 선생의 자연학교가 마음을 잡아끌었다. 교육방침 또한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고 달콤하게 자자'였다.

"거시기, 기억나시는지 모르겠네요, 예전에 선생님허구 식사를 같이 헌 적이 있었는디, 대전에 있던 배달환경에서요. 93년무렵이었으니께, 7년이 넘었쥬 아마..."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덥수룩한 수염을 보니까, 그런 거 같기두 하네..."


배달환경연구소(나중에 녹색연합으로 바뀜)가 대전에 처음 생길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산 생활을 하면서 <배달환경>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실릴 원고를 전해주기 위해 사무실에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 선생을 처음 만났다. 선생은 환경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던 배달환경 사람들을 위해 술을 사야 한다며 무작정 대전으로 내려왔었던 것이다. 그만큼 선생은 환경 문제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흉측한 얼굴이 최대 유산이라 했던 채규철 선생

살아생전 흉측한 자신의 얼굴이 오히려 최대의 유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채규철 선생. 오히려 그 얼굴이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저런 기업체에 다니며 명강사가 된 것도 다 이 얼굴 때문이지."

@BRI@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시립농업대학을 졸업한 채규철 선생은 충남 홍성의 풀무학원에서 농촌운동을 벌였고 장기려 박사와 함께 청십자의료조합 운동(우리나라 의료보험운동의 시발점으로 꼽히고 있다)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 자동차 사고로 선생의 몸은 3도 화상에 50%가 불에 탔고 생사를 오가며 30차례에 가까운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얼굴은 겨우 형체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눈썹도, 코도, 입도 다 있지만 사실 그것도 전부 다 인공으로 만든 작품이었다.(선생은 자신의 얼굴을 걸작품이라 말했다).

눈썹은 뒤 머리칼을 떼어서 이식했고 눈 주위의 피부는 다 타서 없어지고 눈동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어깨 뒷부분의 피부를 떼어서 눈꺼풀을 만들었다. 오른쪽 눈은 의안을 박았는데 눈에 염증이 생겨 1m 앞을 보지 못한다. 입은 찻숟가락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오그라들어 그걸 째고 가슴 피부로 입술을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내 책에다도 썼지만, 다방이나 음식점에 들어서면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며 제발 나가달라고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서 나는 100원짜리 인생이지, 하지만 내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 모르지? 이 얼굴에는 치료비며 관리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위 사람들의 정성어린 헌신이 새겨져 있지, 그 어떤 값어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지."

"가난한 남편 둔 여자들 심정 잘 알고 있지"

자연학교를 둘러보고 선생과 주방에 마주앉아 저녁 식사를 했다. 나는 도시락을 꺼냈고 선생은 찬물에 밥 말아먹었다. 반찬은 김치와 계란프라이가 전부였지만 우리는 캠핑 온 아이들처럼 즐겁게 식사를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선생은 "아내가 내일 아침 기분 좋게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냐며 청소 좀 해놓자"고 했다. 그럴 땐 영락없이 애처가였다.

밖에서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청소를 다 해놓고 선생은 냉장고 구석에 잘 모셨진 반쯤 남은 대병짜리 소주병을 꺼내들고 나왔다.

"내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는 취재기자는 첨 봤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도시락을 싸들고 취재를 다녔다. 밥 사먹을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또한 취재원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궁색 맞아 보인다고 했지만 선생은 그런 내가 맘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른 선생은 바닥난 소주병을 보다가 자신의 전용 텐트로 옮기자 했다. 자연학교 교장실이기도 한 돔형의 텐트에는 반가운 손님에게만 내준다는 꽤 오래된 더덕 술이 있었다.

"이만한 호텔이 또 어딨겠어?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왜 이런 거지같은 곳에서 지내냐고 하지만 나는 여기가 좋아."

선생은 마악 발간한 당신의 책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를 건네주면서 내 아내의 이름으로 사인을 해줬다. 아내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가난한 남편을 둔 여인네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난한 남편으로 살아와서 가난한 남편을 둔 여자들 심정을 잘 알고 있지."

선생은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 178쪽에 있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펼쳐놓고 소리 나게 읽어보라고 했다. '세상을 살 때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로 시작되는 이 글 속에는 함석헌 옹의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가 실려 있었다. 채규철 선생 당신의 애송시이자 좌우명이라고 말했다.

'만리 길나서는 날/처자를 내맡기며/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탓 던 배 꺼지는 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이하 생략'

선생을 다시 찾아뵙고 사죄하고 싶었지만...

나는 선생님 앞에서 또박또박 책을 읽는 초등학생처럼 선생이 육필로 쓴 몇 편의 수필을 더 소리 내어 읽었다. 무르익어 가는 술기운 속에 서로 노래 한 곡 조씩를 번가라 가며 부르고 그렇게 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텐트 밖 어둠 속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기서 자고 가지?"

선생의 얼굴이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언뜻 들어난 선생의 일그러진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선생의 얼굴에서 어떤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아, 예, 저는 그냥 가야 겠는디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후회했다. 선생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그 귀한 더덕 술까지 내놓고 그렇게 잘 대해 줬는데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선생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담근 술을 들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드렸다.

직접 찾아뵙고 사죄를 드리고 싶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것은 선생의 얼굴이 아니라 내 마음자리였음을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조만간 찾아뵙겠다며 한두 차례 전화를 올려놓고 한해 두해 보내다가 내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갔었다. 그리고 선생께서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덧붙이는 글 | 채규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덧붙이는 글 채규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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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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