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옆에 앉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촌놈 일본행 비행기 타다

등록 2006.12.21 18:08수정 2006.12.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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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한일 시민 친구 만들기 행사'에 참여하러 가는 날. 하필이면 가운데 좌석에 앉았습니다. 비행기가 공중에 떠오르자 저만치 창틈으로 얼핏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름 위로 둥실 둥실 떠다니는 하늘을 느끼고 싶어 타조 새끼 모양 고개를 쭉 빼들고 양 옆 좌석을 기웃거려 봤지만 창가 쪽에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나는 이번에는 하늘 위에서 하늘을 실컷 볼 수 있겠다 싶어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가운데 좌석 벨트에 꽁꽁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BRI@가운데 칸은 네 명이 쪼르륵 앉게 되어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 오른쪽 옆 좌석에는 화장을 두껍게 한 아주 젊은 아가씨 둘이 탔다는 것 아닙니까. 좋았겠냐구요? 천만에요. <조선일보>를 좌~악 펼쳐놓고 있던 그 아가씨들, 보통내기들이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 건넸다가는 맞아 죽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살벌한 아가씨들이었습니다.

쌍욕이 입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 낯 뜨거운 줄 모르고 상스런 이야기를 해가며 끼득끼득대다가 내가 신고 있던 털신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벌레 씹은 얼굴이 되더군요. 그러고는 뭔가를 찍찍 뿌려대더라구요. 아마 향수였을 것입니다. 내 털신의 흙냄새가 자신들의 몸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일본에는 뭔 용무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아가씨들은 흙냄새가 싫었겠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평생 화장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누이의 강요에 못 이겨 중학교 때 잠깐 사용한 것이 전부) 진한 화장품 냄새나 향수 냄새 따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벨트에 묶여 꼼짝도 못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인간의 손길 닿지 않은 시원의 하늘을 날고 있었지만 결코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질 좋은 알루미늄 박스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어휴, 죽겠네, 창가에 못 앉즈믄 배루다 가는 게 훨 낫겠네요."
"배로 동경까지 가려면 한창 돌아가야 하니까 꽤 멀죠."


그나마 내 옆 좌석에는 투덜거리는 촌놈 불평불만 다 받아주는 윤형권 시민기자가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얼마쯤 가자 노을빛이 창틈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하늘 위에서 바라본 노을빛은 얼마나 근사할까? 노을 앞에 서 있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하늘 위에 올라와 놓고도 그 노을을 볼 수 없다는 게 억울했습니다.

"허참, 환장 하건네 화장실은 어디유? 창가 쪽에 읎나?"
"가운데 있는데요."


온갖 촌놈 티 다 내며 윤 기자에게 물으니 화장실도 비행기 가운데에 있다고 합니다. 윤 기자는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고 또 해외여행도 자주 했던 모양인지라 하늘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가 막힌 노을빛이 온통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데 창가 쪽에 앉아 놓고도 신나게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우주선 빼놓고 비행기만큼 확실한 놀이기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놀이기구 타는데 큰 돈 지불해 놓고 쿨쿨 잠만 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비행기를 여러 번 타면 싫증이 난다고요?

명화도 여러 번 보면 싫증이 나겠지요? 하지만 하늘은 그 어떤 명화와 다릅니다. 현실 앞에 펼쳐지는 마술의 명화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끊임없이 변합니다. 365일 단 하루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서 보든 아래에서 올려다보든 간에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욕망이 얼마나 부질 없나를 깨닫게 해줍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애초에 창가 쪽 표를 구하지 않고 뭘 했냐구요? 단체여행이라서 지정된 좌석이 있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창가 쪽을 원했으면 창가 쪽 좌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야 알았으니 또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진짜 억울한 것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다시 돌아올 때였습니다.

창가 쪽 표를 구했지만 하늘은 온통 캄캄한 오밤중이었습니다. 구름 한 점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도시의 불빛들을 신나게 내려다 봤지요. 하지만 그것은 감질나는 인간들의 빛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빛은 찬란해 보이지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온갖 탐욕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밤중에는 하늘 위에서 불빛을 보는 것보다는 하늘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보는 게 훨 낫질 않겠습니까? 혹시 비행기 타고 하늘 위를 날아가면서도 별을 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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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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