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30분씩인데 그게 뭐 어때서?"

아내가 '제도교육'이라는 늪에 빠져 들까봐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등록 2006.12.26 15:27수정 2006.12.2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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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우리 집 작은 아이 인상이가 시험 보던 날,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습니다.

"아빠! 나 시험 본 거 몇 점인지 안다."
"그려, 몇 점인디?"
"평균 76점!"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워?"
"아니, 그게 아니구. 선생님이 점수 적어 놓은 거 봤는디."


@BRI@이전에 90점 가까운 평균 점수를 받아 온 녀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당당했습니다. 본래 시험 점수 따위에 크게 관심이 없는 녀석입니다.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한 것은 다른 아이들보다 시험 점수를 먼저 확인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려, 잘 했다 자~알 했어, 어이구 새끼야."
"아빠가 빵점 맞아도 상관없다며."
"누가 뭐라냐? 진짜로 잘 했다니께."

사실 나는 녀석이 시험 망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자식새끼 시험 망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딨냐구요? 그깟 시험 망치면 어떻습니까? 시험 망쳤다고 녀석의 눈이 뒤틀립니까, 아니면 손가락이 꼬이기라도 한답니까?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 녀석에게 시험이 도대체 뭡니까?

공부하고 시험은 다르다고 봅니다. 지혜롭게 살기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공부라면 시험이라는 것은 복잡한 뇌를 가진 어른들이 아이들을 통제하여 자신들의 닮은꼴로 만들어 놓기 위한 '위험한 노름'이라고 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바로 물어봐도 될 빤한 문제들을 꽈배기처럼 배배 틀어 놓는 게 시험 아닙니까?

아내는 아이들의 성품을 망가뜨리고 있는 그 위험천만한 시험 제도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책상머리 앞에 반강제적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책상머리 앞에 앉을 때마다 찡찡거렸습니다. 거기에 맞춰 아내의 목소리도 커져갔습니다.


옆에서 불안하게 지켜보던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공부할 시간이 되면 아내도 아이들도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날이 왔던 것입니다. 인상이 녀석의 평소보다 낮은 시험 점수가 아내의 교육관에 대항할 빌미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애들을 매일 같이 잡아 놓고 문제집 풀게 하는 거, 그거 그만두자"
"하루에 30분씩인데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문제집만 푸나"
"애들하고 신경전 벌이는 게 문제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공부가 되겠어?"
"애들은 다 그러면서 공부하는 거지 뭐, 기분 좋게, 재미있게 공부하는 애들이 어딨어? 애들이 학교 갔다 와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거 당신한테도 문제 있어."


아내는 아이들이 책상머리 앞에 앉기 전부터 짜증을 내는 것이 내 탓이라고 합니다. 평소 아이들에게 하기 싫은 것은 하지 말라(이유가 타당하면)는 식으로 무언의 사주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애들에게 문제집 풀게 하는 거 절대 반대 했잖어, 결국 당신 뜻대로 시험 보는 기간 동안만 시키기로 했는디, 근디 뭐여? 요즘은 매일 같이 시키고 있잖어?"

"하루에 30분 정도는 해야지, 다른 애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구"
"당신한테는 30분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에게는 학업의 연장이라구, 학교에서 여섯 시간 일곱 시간 수업하고 돌아와서 공부하는 30분은 아이들에겐 일곱 시간, 여덟 시간 째 수업을 연장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구, 그건 순전히 당신 욕심여."

"다른 애들은 학원이다 뭐다 훨씬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데 그 정도는 감수 해야지."
"학원 보내지 않는다구? 우리 애들은 학원이나 학습지를 받아보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당신한데 전 과목을 과외 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

그렇게 부부 싸움은 시작됐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남들 다 보낸다는 학원은 보내지 않고 있지만 남들처럼 교육문제를 놓고 부부 싸움을 시작한 것입니다.

"애들에게 점수 따위로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구, 그래도 평균 80점은 돼야 한다고 봐."

"집에서 문제집을 풀든 안 풀든 그동안 인효는 늘 평균 90점 이상을 받아오고, 인상이 녀석도 마찬가지여, 80점 이상은 받아 왔잖어, 그만큼 애들이 학교에서 열심히 한다는 증거니께 걱정할 거 없다구, 문제집 따윌 풀어서 시험 점수 잘 받아 오면 또 뭘혀? 이번에 인상이 시험 본 거 보라구, 거의 매일 같이 문제집 풀었는데 당신이 원하는 80점도 안 나왔잖어, 그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공부 시키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겨."

"중학교 들어가서 뒤처지지 않게 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공부해야지."
"중학교 때 뒤처지지 않게 한다구? 다들 그러지, 이유가 있지, 그래서 죽어라 공부시키는겨,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야 살아남는, 무슨 피 터지는 생존 게임도 아니구, 그렇게 해서 잘 먹고 살믄 뭘 혀."

"당신은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해, 시켜야 할 것은 시켜야 되잖아."
"내 말은 애들 공부 시키지 말자는 것이 아녀, 그렇게 문제집 따위나 풀어서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대학가서 또 뭘 할껴, 그게 교육여, 문제집 푸는 기계를 만드는 거지."

"누가 문제집만 풀게 한데…."
"어이그, 백 날 명상 하믄 뭘 해!"
"내가 명상하는 거하고 무슨 상관 있다고, 당신도 마찬가지여! 명상 한다는 사람이 버럭 버럭 화를 내고 있잖어!"

"나는 명상 안 혀."
"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해놓고…."
"지금은 안 혀, 실천하지 않고 백날 쭈그려 앉아 명상만 하믄 뭘 혀, 애들이나 들볶는 걸."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아내를 공격했고 아내 역시 반격을 가해 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아이들 교육은 뒷전에 팽개쳐 놓고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본격적으로 부부싸움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냉전에 돌입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고민 끝에 아내에게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애들이 컴퓨터 하는 날, 일주일에 두 번, 그날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고 지들 맘대로 놀게 해주자, 단 10분도 공부 시키지 말자,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혀, 가능하면 아이들 스스로 공부 할 수 있도록 하면 더 좋구."

"그렇게 하지…."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기만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다른 집 애들은 컴퓨터를 옆에 끼고 살다시피 하는디, 우리 애들은 일주일에 딱 두 번만 하잖어, 텔레비전도 거의 안 보고, 공부는 매일 시키면서 하지 말라는 것은 더 많고, 애들 한티는 불공평 하잖어, 안 그려?"

아내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 줬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 대해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한번 발 딛게 되면 헤어나기 힘든 '제도교육'이라는 늪에 깊이 빠져 들까봐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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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그 날, 인상이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볏짚부터 찾습니다. 아내가 말문을 닫고 있을 무렵 녀석에게 새끼줄 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단단히 재미를 붙인 모양입니다. 학교에서도 연필을 가지고 새끼줄 꼬는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서툰 솜씨로 새끼줄을 꼬다가 녀석이 뜬금없이 그럽니다.

"아빠 나는 중학교 안 갈려."
"그려? 가기 싫어? 니 맘대로 혀, 가기 싫으면 안가는 거지 뭐."
"앗싸!"

"근디 왜 가기 싫은 거여? 그 이유나 알자."
"학교 입학할 때 한글을 잘 모르고 들어갔지만, 이젠 한글도 다 뗐잖어?"
"그럼 4학년 마치고 그만둘텨?"
"그냥 초등학교는 다 다닐텨 친구들이 있으니까."

"근디 인상아, 너 새끼줄은 왜 꼬는겨?"
"그냥 재미있어서."
"안 힘들어?"
"별루, 어? 손 안 씻어도 되겠다. 새끼줄 꼬다 보니께, 손바닥에 때가 벗겨지네."

손바닥 때가 벗겨지도록 새끼줄 꼬는데 재미를 붙인 인상이 녀석. 이런 녀석에게 시험 점수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자연과 생태> 2007년 1월~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월간 <자연과 생태> 2007년 1월~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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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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