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의 마차가 거니는 곳, 경포대에서

영화처럼 재미있는 동해안 문화기행 (13)

등록 2006.12.19 20:44수정 2006.12.1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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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오오...'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아름다운 시구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내 마음이 호수처럼 넉넉하고 맑으니, 사랑하는 그대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라고 슬며시 고백하는 마음. 거울처럼 투명한 호숫가에 서서 떠오르는 은색의 달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포옹하는 연인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은 언어의 묘사가 필요 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두 연인의 마주잡은 손 사이로 달빛이 미끄러져 들어오면 그들의 마음에는 어느새 다섯 개의 달이 묘려하게 떠오른다. 달은 호수와 바다, 술 잔속에 비치다가 하늘가에서 서서히 맴돈다. 그러다가 애인의 눈에 달빛이 비치면 낭만적인 흥취가 은밀하게 타오르게 된다. 만일 이런 상황을 경포대에서 맞이한다면 연인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잔잔한 경호
잔잔한 경호김대갑

동해안의 수많은 석호 중에서 ‘경포호’만큼 대접을 받는 호수는 드물 것이다. 호수 주변에 무려 12개의 정자가 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앞 다투어 칭송했으며, 지금은 호수 주변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경포호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산의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임지로 가던 송강 정철도 경포호의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경호인가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경호인가김대갑

석양 무렵 현산의 철쭉꽃을 잇따라 밟으며,
신선이 탄다는 마차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십리나 뻗쳐 있는 잔잔한 호수물이
흰 비단을 다리고 또 다린 것 같구나.
맑고 잔잔한 호수물이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이 잔잔하기도 잔잔하여
물 속 모래알까지도 헤아릴 만하구나.
-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 본사 (2)-4 중에서.


새 깃으로 뚜껑을 만든 마차, 이른바 우개지륜을 타고 송강은 경포로 내려갔다고 했다. 우개지륜은 신선이나 귀인만이 탈 수 있는 고귀한 마차이다. 평범한 마차를 타고 경포호를 구경하는 것이 마치 큰 실례라도 되는 양, 송강은 부러 우개지륜을 들먹이며 경포호의 아름다움을 우회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뛰어난 묘사력이 내밀하게 깔려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포대에서 바라 본 경포호
경포대에서 바라 본 경포호김대갑

거울처럼 너무 맑다고 하여 이름마저 ‘거울호수’가 되어버린 경포호. 경포호는 경호, 또는 군자호라고도 불리는 동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석호 중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바다였다가 흘러내린 토사에 의해 바다와 별리의 아픔을 겪은 호수이기도 하다. 그 별리는 호수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인간에게는 다행이었다. 한 자리에서 동해의 일출과 호수에 비친 달의 운치를 동시에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경포호는 그 이름에 걸맞게 하늘의 모습을 하늘보다 더 푸르게 비추는 거울 같은 호수였다고 한다.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모습을 어스름 달빛에도 볼 수 있고, 호수에 투명하게 비치는 미인의 얼굴이 원래 모습보다 더 아름답다고 했을 정도로.

그리고 예전에는 삼십리의 둘레를 자랑하는 방대한 호수이기도 했단다. 지금은 흘러내린 토사에 의해 십리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잔잔한 수면은 백리, 천리도 부럽지 않은 평탄함을 안겨준다. 한마디로 빙판 같은 시원함과 탁 트인 시야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호수가 바로 경포호이다.


숲 속의 경포대
숲 속의 경포대김대갑

이 경포호를 낮은 언덕 위에서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소담한 정자가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경포대’이다. 그런데 이 경포대의 역사가 예사롭지 않다. 호숫가 주변에 경포대라는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옛 절터에 있던 건물을 뜯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고려 충숙왕대의 관리였던 박숙정이 인월사 옛터에 경포대를 지었는데, 조선 시대 중종대의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하니 그 대단한 프로젝트에 경탄을 표할 수밖에.

신선의 마차인가
신선의 마차인가김대갑

그만큼 경포호와 그 주변의 경치가 사람의 넋을 빼앗을 정도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아니면 경포대라는 건물이 주는 미학적 가치가 경포호와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두 존재의 합궁을 감행했다고 짐작해야겠다.


아마 경포대와 경포호는 전생에 오래된 연인이었을 것이다. 월출을 바라보며 미래를 기약했던 연인들의 단골 장소가 경포대였으며, 별리의 아픔을 간직한 여인의 한이 고요히 스며있는 곳도 경포대였다. 그렇게 수백년 간 경포대는 경호를 바라보며 북풍한설과 춘향의 계절을 견디었던 것이다.

경포대해수욕장
경포대해수욕장김대갑

경포대를 제대로 즐기려면 춘사월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호수 주변에 수많은 벚꽃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벚꽃이 왜색풍이라 하여 비난의 눈길도 보내기도 하고 혹자는 우리나라의 벚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벚꽃이 만개한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것도 경포호 같은 호수 주변에 화려하게 핀 벚꽃은 자연이 주는 최대의 혜택이다. 더군다나 달이 뜨는 밤에 보는 벚꽃의 야경이란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훌륭한 경치를 쉬엄쉬엄 즐기면 그뿐이다. 거기에 향긋한 술과 맛있는 음식이 함께 하면 더욱 좋고.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은 여인의 늘어뜨린 머리칼처럼 긴 여운을 경포호에 점점이 뿌리며 서서히 올라온다. 경포호에 비친 달빛은 달 탑이 되기도 하고 달기둥이 되기도 한다. 달기둥과 달 탑은 어느새 달 물결이 되어 호수를 적신다. 송강의 말처럼 경포호의 월출은 넓고도 아득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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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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